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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거가 끝나고 난 뒤

등록 2022-03-20 18:20수정 2022-03-21 02:32

제20대 대통령선거 이튿날인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오금역 인근에서 가락본동주민센터 관계자들이 대선 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20대 대통령선거 이튿날인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오금역 인근에서 가락본동주민센터 관계자들이 대선 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조형근 | 사회학자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먼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 4학년 때 단과대 학생회장에 출마한 일이다. 꿈에도 생각 못 해본 일이었다. 예전엔 선배들이 후보를 지명했다는데 그때는 처음으로 후보를 투표로 뽑았다. 도대체 왜 내가 뽑혔을까? 소속된 조직조차 없는 외톨이라는 게 이유였을 법한데 아직도 모른다. 학생회장은 자동으로 경찰 수배가 되던 시절, 나서려는 이들이 없었다. 며칠 고민 끝에 결국 수락했다.

사실 순수한 결심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 쪽이 크게 열세라 당선은 어려웠다. 선거운동은 힘들어도 떨어지면 그만이었다. 낮에는 강의실 유세 하고, 밤엔 학과 모임을 찾아 술 마시고 노래했다. 그런데 슬슬 뜨거운 게 올라오는 것이었다. 꼭두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학생회는,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진지해졌다. 날 위해 운동하는 후배들을 보면 울컥했다. 합동유세 때는 연설하다 눈물까지 났다. 선거에 져도 학생회 일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결과는? ‘졌잘싸’였다. 표차가 예상보다 적었다. 지려고 나갔어도 아쉬웠다. 선거운동 하다 마음가짐이 바뀐 것이다. 약속대로 학생회에 참여했다. 정세토론 때는 외톨이였지만, 문화부장으로서 학생들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준비 안 된 학생회장이 되느니 그 편이 나았다.

대선이 끝났다. 고작 단과대 학생회장 선거로도 저랬는데, 대선 기간 동안 후보들의 진심과 열정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조차 두렵다. 선거운동원과 지지자들도 오죽했으랴. 선거는 후보와 지지자들 사이에 강렬한 감정의 연대를 낳는다. 특히 1번 후보와 지지자들 사이의 변화가 두드러져 보였다. 처음엔 후보와 지지자 사이의 일체감이 약해 보였는데, 선거운동이 진행될수록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이들이 늘어났다. 막바지엔 감동을 고백하는 이들도 많았다. 정치적 실천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뜨거웠던 다짐들 부디 잊지 마시길.

이제 선거가 끝나고 일상의 시기가 왔다.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원을 뽑는 동안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 비판에 꼭 동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선거와 일상의 대비다. 폭풍 같던 정치의 계절이 지나간 뒤 비루한 일상을 어떻게 버틸까?

나처럼 동네살이 하는 이들에겐 일상이 특히 중요하다. 정치색 따지면 동네의 일상은 아예 불가능하다. 동네에선 1번과 2번 지지자도 협력해야 한다. 여기선 인간을 정치 지향 따위로 축소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된다. 인간은 그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이러니한 존재다.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 사이에서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삶을 종종 발견한다. 정치는 중요하지만 삶은 정치보다 훨씬 크고 깊다.

지역의 일상이야말로 정치와 관련되면서도 구별되는 ‘사회’의 기초처럼 보인다. 지역의 인간관계가 그저 아름다울 리는 없지만, 싫다고 단절하거나 상대 몫을 죄다 뺏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막스 베버가 함께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을 수반하는 ‘공동관계’라고 묘사한 인간관계의 특징이다. 베버는 심지어 시장처럼 계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인간관계에서조차 직접적 대면관계는 어느 정도 소속감을 수반한다고 통찰했다.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 중 상당수는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지역이 붕괴하고 공동의 감각이 실종된 데서 비롯됐다.

선거일 직전인 3월7일, “밤에만 다니던 청소차…”라는 뉴스가 나왔다. 원래 낮에 일하던 환경미화원들이 걸리적거리고 보기 싫다며 88올림픽 전부터 야간근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뒤 30년 넘게 밤새 일하고 있다. 건강에도 나쁘고 몹시 위험하다. 종종 다치고 때로 죽는다. 권한을 쥔 지방자치단체들이 민원을 꺼려서인지 대개 밤근무를 고수하고 있단다. 알고 보면 이런 ‘이웃’들이 도처에 만연해 있다. 보고도 못 본 체할 뿐. 우리 지역은 어떤지 알아보고 고치라고 요구해보자. 우리 동네 협동조합 서점은 며칠 전 연구자들이 구입하는 책값의 10%를 적립해서 지역의 대학원생들에게 지원하기로 뜻을 모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같이 기뻐했다. 후보들과 함께 뜨거워졌던 마음을 이런 쪽으로 조금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선거가 끝나도 우리 공동의 감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사실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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