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한겨레 프리즘] 서정민 | 문화팀장
서울 토박이에게도 ‘마음의 고향’이 있다. 내겐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가 그런 곳이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이라면 모를까, 아파트가 어떻게?’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아파트는 좀 유별나다. 1980년 입주를 시작한 이곳은 1~4단지 143개동 5930가구가 한 울타리 안에 모인 대단지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81년 이곳에 들어갔다. 옛날 아파트가 대체로 그렇지만, 여긴 동 사이가 유독 넓고 녹지가 많았다. 낮이면 텅 빈 주차장을 운동장 삼아 오징어,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다.
십대 시절을 오롯이 보내고 군대 갈 때까지 살았던 이곳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은 건 2017년이었다. 재건축을 한다고 했다. 허물기 전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다. 공식 이주 기간이 거의 끝나가던 이듬해 1월 그곳을 찾았다. 곳곳에 스민 추억을 곱씹자니 댐 건설로 수몰되는 마을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나처럼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주민들은 기록으로나마 남기고자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구석구석 쌓인 추억을 담은 글과 사진을 모아 책을 냈고, 다큐영화 <집의 시간들>(2018)도 만들었다.
다큐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그땐 몰랐다. 이곳을 떠나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난 17일 개봉한 정재은 감독의 다큐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보고서야 이 공간이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2016년 처음 둔촌주공아파트를 찾은 정 감독은 ‘아파트가 재건축되면 여기 살던 고양이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으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2017년 5월부터 아파트가 완전히 해체된 2019년 11월까지 2년 반 동안 촬영했다.
영화 속 고양이들은 사람을 피하는 법이 없다. 사람 손길을 즐기기까지 한다. 주민들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고 먹을 걸 준다. 길고양이가 아니라 ‘동네 고양이’다. 고양이들은 이삿짐을 내리는 사다리차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평소 자기네들을 치료해주던 약국 할아버지가 왜 ‘폐업’ 딱지를 붙였는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왜 “개냥아, 안녕. 우리 이별이야” 하며 아쉬워하는지 알 턱이 없다.
다큐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사람들은 아파트가 무너지고 없어지는 걸 알지만, 고양이들은 모르니까요. 그냥 두면 죽을 수도 있잖아요.” 주민들과 동물보호운동가들이 ‘둔촌주공아파트 동네 고양이의 행복한 이주를 준비하는 모임’을 만든 이유다. 이들은 300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들을 차근차근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살던 곳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사람과 유독 친밀한 고양이는 입양을 추진하고, 다른 고양이들은 점차 활동 영역을 옮기도록 유도한다.
이들은 고양이를 시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고양이는 이웃일 뿐, 누구도 그들에 대한 소유권은 없다. 그냥 원래 살던 애들이고, 문제가 생기면 개입해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캣맘들의) 모정이 대단하다는 식이면 엄마들만 계속 희생해야 한다. 이런 전시에 가까운 재난 상황일 때는 사회에서 도움을 줘야 한다”는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다큐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한겨레> 기자이자 환경논픽션 작가인 남종영은 책 <안녕하세요, 비인간동물님들!>에 이렇게 썼다. “구석기시대에 인간과 동물은 하나의 세계에서 살았다. 존재론적으로 평등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초월자의 성벽을 쌓고, 성 밖으로 몰아낸 동물을 생산하고 착취했다. 그 결과, 인간은 동물과 다른 세계에 산다.”
지난 대선 후보들의 동물 관련 공약을 보면, 단순히 반려동물에 국한한 정책부터 포괄적 동물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정책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선거엔 승패가 있어도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는 승패가 없다. 길게 보고 한걸음씩 나아갈 일이다. 당장 내가 사는 공간이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인정하자. 이젠 성벽을 허물고 다시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