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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바다가 대지를 부르는 곳

등록 2022-03-17 17:59수정 2022-03-19 17:27

바다가 대지에 말을 걸고 대지가 바다에 귀 기울이는 땅, 경기도 시흥 갯골. 사진 배정한
바다가 대지에 말을 걸고 대지가 바다에 귀 기울이는 땅, 경기도 시흥 갯골. 사진 배정한

[크리틱]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이른 봄은 일년 중 가장 변화가 많은 시기다. 따뜻한 봄 햇살이 음습한 겨울 기운과 ‘밀당’을 벌이며 생명의 힘을 깨운다. 겨울을 견뎌내며 잠든 자연의 힘을, 봄은 세상 바깥으로 힘차게 밀어낸다. 역동하는 경계의 시간, 불안정하지만 그래서 더 창조적인 새봄에는 누구나 희망을 품는다. 봄나들이는 결코 틀에 박힌 표현이 아니다. 문밖으로 나서 봄을 감각해야 한다.

잠시 걷기만 해도 언제나 위로를 안겨주는 곳, 시흥갯골생태공원에 다녀왔다. 150만㎡에 달하는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일대의 갯골 공원은 일제가 천일염을 생산해 본토에 공급하려고 만든 소래염전이 자리했던 곳이다. 소금 생산이 중단된 뒤에는 불모의 땅으로 버려져 온갖 쓰레기와 폐기물이 투기되는 질곡의 세월을 겪고 다시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축축하게 뒤엉킨 잡념과 소란한 시절의 우울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소, 이 공원의 가장 큰 매력은 막힘 없이 사방으로 뚫린 시원한 풍경이다. 텅 빈 하늘과 광활한 들판의 콜라주, 물과 뭍과 식물이 뒤섞인 두꺼운 질감, 바람이 실어 나른 비릿한 바다 냄새가 함께 빚어내는 공감각의 경관.

시흥갯골생태공원은 바다가 대지를 부르고 대지가 바다에 답하는 경계의 공간이다. 갯골은 밀물과 썰물 사이에 바닷물이 들고 나며 잠겼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고랑이다. 시흥 갯골은 서해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며 만들어낸 거대한 ‘내만’ 갯골인데, 바닷가 넓은 갯벌과 달리 깊고 좁은 곡선이고 그 형상이 뱀과 비슷해 ‘사행’ 갯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시흥 갯골은 해양 생태계와 육상 생태계가 만나고 섞이는 ‘이행대’(移行帶)다. 경계와 이행의 지대, 갯골은 지역 생태계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젖줄이자 다양한 생물의 터전이다.

이행대로 번역되는 에코톤(ecotone)은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탄성을 뜻하는 토노스(tonos)를 합친 말이다. 생태학적 긴장과 풍요의 공간인 이행대는 두 지대를 잇는 다리처럼 불안정한 경계 너머의 생물들을 교류하게 하는 생태적 탄력을 띤다. 시인 함민복이 노래하듯,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의 저자 나탈리 크나프는 생태학적 이행대의 잠재력에 빗대 인생의 과도기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불확실한 시기에 삶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삶의 과도기가 불안정하면서도 창조적이듯, 전이와 이행의 땅 갯골은 경계의 생태계가 발산하는 경이로운 풍경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가을을 붉게 물들인 시흥갯골생태공원의 칠면초 군락. 사진 배정한
가을을 붉게 물들인 시흥갯골생태공원의 칠면초 군락. 사진 배정한

시흥갯골생태공원의 아름다운 경관 저 밑에는 농게, 방게, 말뚝망둥이 같은 저서생물이 서식한다. 이들을 먹이로 삼는 도요새, 쇠백로, 흰뺨검둥오리, 괭이갈매기, 왜가리, 저어새가 한데 어울려 거주한다. 개펄 속 생물이 바닷물 속 미생물을 흡수해 자체 정화를 하고, 소금기 많은 곳에 자라는 퉁퉁마디, 나문재, 칠면초 같은 염생식물 군락이 깨끗한 산소를 뿜어낸다. 갯골의 공기가 어느 때나 맑고 신선한 이유다.

계절의 변화를 고즈넉이 전시하는 칠면초 군락, 바람 따라 춤추는 은빛 억새꽃, 개펄의 속살을 뚫고 들락거리는 게들의 분주한 군무. 생태학적 이해나 생물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이행대의 긴장감 넘치는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다. 갯골의 절정은 칠면초가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이지만, 이른 봄의 갯골도 시련의 과도기를 통과하는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봄을 맞은 이행대의 질감을 눈으로 만지고 발로 걸으며 감촉하면 겨울의 찐득한 무게에 짓눌렸던 몸과 마음이 변화에 참여하는 기쁨을 얻는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갯골을 걸었다. 바다가 대지에 말을 걸고 대지가 바다에 귀 기울이는 경계의 공간에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이 찾아들었다.

경계의 생태계가 발산하는 경이로운 풍경. 사진 배정한
경계의 생태계가 발산하는 경이로운 풍경.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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