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1990년대 초중반엔 ‘오렌지족’이 있었다. “호화사치 청소년층 이른바 ‘오렌지족’들이 서울을 벗어나 경기 남양주 가평 일대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 풍광 좋은 북한강변에는 수상스키장, 골프장 등이 산재해 일시적인 ‘서식처’로 택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1993년 6월17일 <동아일보>) 이 기사는 골프 치다 카페에 들러 양주 마시는 오렌지족의 하루를 <동물의 왕국> 해설처럼 소개한다. 당시 언론은 대놓고 ‘오렌지족’을 비꼬았다. “무쓰 바른 맥가이버 헤어스타일” “외제차” “하룻밤에 한 달 월급에 가까운 술값” 등을 비판하는 독자투고도 여럿이다. 1991년 유하 시인은 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에서 압구정동을 “욕망의 통조림공장”이라 불렀고, 1992년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만들었다.
‘오렌지족’이 좀 억울했을 거 같기도 하다. 외국 유학 갔다 온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다 같지는 않을 텐데 사치, 향락 따위 낱말과 엮여 한 꾸러미로 욕먹었으니 말이다. 문란이나 왜색을 들어 비판하는 시선은 지금으로 치자면 ‘꼰대’스럽기도 하다. 이 모든 조롱의 바탕엔 제 손으로 벌지 않은, 물려받은 돈을 펑펑 쓰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년 전인 1994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달러를 돌파했고 그해 경제성장률은 9.2%였다.
부의 대물림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오렌지족’의 21세기 버전은 ‘금수저’다. 부러움과 조롱을 함께 받았던 ‘오렌지족’과 달리 ‘금수저’는 그저 선망의 대상이다. 프리지아(송지아·24살), 구독자 100만명이 넘는 유튜버는 방송이나 유튜브 영상에서 명품 짝퉁을 입었던 게 드러나 그야말로 잘근잘근 씹혔다. ‘사이버 레커’들이 들고일어나 그의 가족 정보까지 캐고 다녔다. 프리지아는 사과문을 쓴 것도 모자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다시 사과했는데, 그걸로 외모 조롱까지 당했다.
그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 몇몇 짝퉁을 입고 나온 게 가족 신상까지 털릴 정도의 잘못은 아니다. 프리지아가 사는 수십억대 한강뷰 집이 그의 소유가 아닌 것도 여러 죄목 중 하나다. 핵심은 금수저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배신감이다. 애초 그가 슈퍼 인플루언서가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금수저를 향한 선망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금수저라고 말한 적이 없다. 좋은 집에 살며 명품을 사는 ‘영 앤 리치’의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는 사과 영상에서 “처음에는 예뻐서 샀는데 다들 좋아해주니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고 했다. 선망의 뒤엔 시기가 있고, 잘나가는 여자의 추락은 재미난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짝퉁’ 사건 이후 프리지아와 ‘찐’ 금수저라는 유튜버를 비교하는 글이 몇몇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왔다. “찐 금수저 옆에서 눈치 보는 느낌”이라는 비아냥 댓글이 달렸다. ‘금수저’는 재력만 뜻하지 않는다. 부잣집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의 ‘품격’까지 아우른다. 인터넷 카페에선 ‘흙수저 집안’이라는 글이 돌았다. 외모, 식사 예절까지 끌어들여 흙수저 부모를 모욕하는 글이니 옮기지 않겠다. 가난은 가난 자체로 조롱거리다. 왜 흙수저 ‘부모’를 모욕할까? 혈통에 따라 이어지는 계급은 신분이니까.
내가 ‘라떼는~’ 방식으로 오렌지족과 금수저를 향한 시선을 비교하며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니 신분만 남았다”고 말하자, 30살 친구가 답했다. “예전에야 노력하면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니 오렌지족을 조롱할 수 있었겠죠. 지금은 그런 기대가 사라졌어요. 부가 신분의 척도가 된 지는 오래고 그 신분은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선망할 수밖에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