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언니와 탱크를 막을 그물을 짜는 동안 오빠는 참호를 팠다. 오늘은 부모님 친구가 총 쏘는 법을 알려주었다.”(발레리아·19살, 스밀라 거주)
“친구들에게 하루에도 열두번 ‘사랑해’라고 말한다. 전투기가 날아들고 방공호로 뛰어가며 우리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마음을 전한다.”(아나스타시아·24살, 키이우 거주)
3월11일치 <뉴욕 타임스>에 실린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말이다. 모두 1991년 이후 독립된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랐다. 자신을 민주주의와 우크라이나어, 평화를 수호하는 전사라고 규정한다. 이들의 저항에 세계 시민은 연대로 화답하고 있다. 남산 타워, 에펠탑, 브란덴부르크문이 밤하늘 아래 노랑과 파랑 불빛으로 등장했고, 나의 아이들이 등교하는 골목에도 노랑과 파랑으로 칠한 담벼락이 나타났다. 모두들 인간다움을 누리려는 우크라이나인을 지지한다. 공습이 멈추고 탱크가 물러나기를 바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눈앞에서 팔다리를 앗아가고 숨을 멎게 하는 보이는 전선 속에 갇혀 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전선에 옭아매어져 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그 주, 유엔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 전역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금까지 예측보다 더 빨리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며 십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을 급격히 줄이지 않으면 가난한 지역, 가난한 계층부터 고통으로 잠식될 것을 수치로 예고했다. 각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10~23%까지 줄어들 수 있다는 경고다. 세계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기후위기라는 기본 위기 속에 갇히고 말았다.
두 전쟁은 폐허로 가는 속도만이 다를 뿐이다. 폭격에 무너지는 우크라이나 건물들이 계속해서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반면, 보이지 않는 전쟁은 10년 기한이 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정치인들이 협상한 시간일 뿐 과학자들이 제시한 시간은 아니다. 위태로움은 이 두 전선 모두를 타고 흐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고비를 넘긴 시점부터 산업의 기득권은 원자재값 폭등, 소비 반등을 들며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시한을 미루자는 말을 국제 협약 테이블에 올렸고,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자 원유와 천연가스 회사 경영자들은 생산량을 줄일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며 느긋해하기까지 한다. 1년 전 이미 코로나 이전의 소비로 돌아선 휘발유는 그 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급기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푸틴의 전쟁이 자동차 주유구를 통해 미국 가정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원유 생산을 늘리자고 나섰다. 지난 11일 미 휴스턴에서 막을 내린 ‘연례 국제 에너지 콘퍼런스’(CERAWeek)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전선이 어디까지 후퇴했는지 선명히 드러내주었다. 그동안 석유와 가스에서 벗어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던 에너지 산업은 2022년 봄, 석유와 가스 공급을 보장하는 지점으로 회귀했다.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가스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지금은 우리가 악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해결책의 일부예요’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기후위기에 맞서온 중앙정부들의 대응은 ‘전쟁으로 인한 단기적 조치’라는 조건을 붙이며 석유와 가스, 석탄으로 후퇴했다. 무엇보다 바이든 정부를 비롯하여 재생에너지 인프라 전환을 선언한 국가들의 의회는 어제와 같은 하루를 연장하고자 하는 시장과 소비자의 얽힌 욕망을 방패 삼아 섶을 지고 한발씩 불구덩이로 뒷걸음치는 형국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경을 넘어 모두를 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의 전쟁’이 되어 우리의 내일을 흔든다. 총성이 멈추어도 주춤거린 에너지 전환 속도만큼 하늘은 온실가스에 잠식될 것이며 해수면은 오르고 산과 강 그리고 뭇 생명의 매일은 편치 않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멈춰야 할 이유다. 이제 재난은 더 이상 이슈별로 다가오지 않는다. 신문의 섹션이 무색하게 정치 경제 사회 환경의 문제가 한 덩어리로 파고를 높이고 있다. 어떤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든, 보이지 않는 전쟁의 파고를 잠재울 기후위기 돌파라는 기본 해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성장과 기후위기 돌파를 함께 좇는 오늘의 인식은 ‘안보를 위한 전쟁’만큼이나 스스로 놓은 덫을 걷지 못하고 있어 입이 마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