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베일리, <바니타스 상징물이 있는 자화상>, 1651, 나무에 유채, 라켄할시립박물관, 레이던.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난 2년간 코로나의 지속으로 음식점에서 여럿이 모이는 대신 지인 한두명을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텔레비전을 보던 곳이 응접실로 바뀌어 공개되면서 거실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거실에 걸어놓을 용도로 미술 작품 구입에 과감히 돈을 써봤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거실이 가지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곳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전시장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소셜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미지를 선택해서 올리면 그 이미지들은 차곡차곡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분류해준다.
옛 서양화 중에는 표면이 변색해서 묵은 먼지를 닦아내는 복원 작업을 거쳐야 하는 것이 많다. 그을음이 올라오는데도 벽난로 위쪽에 그림을 붙였던 이유는 불이 있는 따스한 곳이 손님과 더불어 와인이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기 좋았기 때문이다. 거실이 일종의 채팅방이고, 벽난로 위의 그림이 내 상태를 말해주는 프로필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몇백년 전의 집주인은, 요즘 우리가 소셜미디어의 배경 화면을 바꾸듯, 벽에 걸린 그림을 간혹 교체했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부자들의 거실에는 고급스러운 은쟁반과 유리잔에 담은 음식, 꽃병 속의 튤립, 또는 사냥한 죽은 짐승 등을 그린 정물화가 주로 걸려 있었다. 집에 초대받은 손님은 벽의 그림에 대해 한마디 던지는 것이 예의였는데, 이왕이면 탐미적이면서 심오한 상상으로 화두를 끌어갈 수 있어야 했다. 격조 높은 대화를 유도하는 사람으로서 화가의 역할은 컸다. 화가는 그림을 주문한 고객이 지인들과 풍부한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하면서, 감상의 포인트를 그림 속에 심어두기도 했다.
간혹 집주인 중에는 과시욕이 좀 큰 사람이 있다. 대화를 유도하기보다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것이 목적인 사람 말이다. 이를테면 사냥 취미는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 말을 타고 땅을 둘러보며 누리는 특권이었다. 그렇지만 사냥을 해본 적 없는 일반 부자들 역시 사냥의 결과물을 그림으로 걸어놓고 자신도 귀족과 같은 재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실제의 취미와 관련 없이 그저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그린 그림을 ‘프롱크’(pronk) 정물화라고 부른다. 프롱크는 네덜란드어로 장식과 겉치레를 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집 한 채 값이나 하는 희귀한 무늬의 튤립을 꽂아두고 식사를 즐길 만큼 세상 부러울 것 없던 부자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바니타스’(vanitas)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텅 비어 있다는 뜻이고, 삶의 덧없음을 주제로 한다. 네덜란드의 화가 다비드 베일리가 그린 <바니타스 상징물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해골, 초, 동전, 유리잔, 시계, 장미, 진주 목걸이, 책 등이 나열되어 있고, 그 옆으로 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함께 놓이면 의미가 공허해지고 만다. 시계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촛불의 불이 꺼진 것은 생명이 끝나는 날을 뜻한다.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꽃은 시들어 있어서, 부귀영화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여인의 피부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광채를 내던 진주 목걸이도 이제 해골 아래 놓여 있다.
거실에 걸린 그림은 나의 상황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그림만 고르기보다는 가끔은 오늘날 자신의 삶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철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인생그림이 걸린 거실이야말로 미술과 삶이 마주치는 첫번째 장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