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의 기억 폴란드 _03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신발들을 바라보면 옛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말이 떠올랐다. 1932~1933년에 스탈린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이 곡물을 징발하면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300만명이 이상이 아사했을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한 사람이 죽었다면 그건 비극이지만 수백만명이 죽었다면 그건 통계 수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5블록 건물 2층에서 수북이 쌓인 희생자들의 신발(박물관 쪽은 11만켤레를 보관하고 있다고 함)들을 보게 되었는데, 대부분 어둡고 칙칙한 신발 가운데 유독 빨간 구두 한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전시실의 조명은 어두웠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레 동공이 크게 열려서 그 구두를 한참을 살펴보았다.
나는 아우슈비츠를 찾을 때면 매번 사진 속 유리 벽 넘어 빨간 구두를 일부러 찾았다. 유리 벽은 두꺼워 반사광을 피하려고 사각으로 바라보면 빛의 굴절로 구두들이 아른거렸다. 주인 잃은 수많은 신발은 “우리가 왜 이곳에서 학살당했는지”라고 흐느끼며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절멸의 대상자들은 독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부터 벗어야 했을 것이다. 빨간 구두의 주인공은 젊고 건강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과연 몇살쯤 되는 여성이었을까,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있었을까, 그렇다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미혼이었을까?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내가 사진 속 빨간 구두의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집착한 이유는 그 한 사람을 통해서 그 옆에 함께 수북이 쌓여 있는 죽음들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빨간 구두 주인공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 사랑, 애절함. 비극이 차고 넘칠 텐데 이곳에서만 그 죽음이 110만이다.
아우슈비츠의 빨간 구두를 생각하면 홀로코스트에 대한 저항 영화로 알려진 <쉰들러 리스트>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흑백으로 제작된 이 영화에서 상영 시간 194분50초 분량 가운데 다섯번에 걸쳐 등장하는 컬러 장면을 나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 게토(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어린 소녀(올리비아 다브로프스카)가 유일하게 붉은색 구두와 코트를 입고 등장한다. 그 소녀는 나치 총부리에 쓰러져가는 어른들 사이를 표정 없이 걸어 다닌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59분15초를 남겨둔 프레임에서 등장하는 장면은 그 소녀가 대량 학살터로 변해버린 수용소에서 결국은 희생된 뒤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소각장으로 가는 모습이다. 나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도를 정확하게는 꿰뚫지 못했지만, 나치의 학살극으로부터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붉은 코트의 소녀를 통해 고발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것은 훗날 제노사이드 작업을 하면서 아우슈비츠를 찾았을 때 발견한 빨간 구두와 연결되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신발들을 바라보면 옛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말이 떠올랐다. 1932~1933년에 스탈린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이 곡물을 징발하면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300만명이 이상이 아사했을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한 사람이 죽었다면 그건 비극이지만 수백만명이 죽었다면 그건 통계 수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사태 이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와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졌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또다시 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할까 염려스럽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니얼 퍼거슨도 지난해 출간한 팬데믹 등 참사의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다룬 저서 <둠 재앙의 정치학> 1장 ‘죽음의 의미’에서 스탈린의 말을 인용한다. 망각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어쩌면 수백만명을 살상하고도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독재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량학살에 관한 끔찍한 말과 기억들을 떠올리며 아우슈비츠 정문을 나서는데 수용소 담장 너머로 벚꽃과 홍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땅바닥엔 흰색 노란색 들꽃이 만발했다. 관람객들의 옷들도 울긋불긋해서 마치 봄맞이 꽃구경 온 듯했다. 수용소 투어를 마친 관람객들은 타고 온 단체 관광버스에 올라 홀연히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해가 저물어 고요함이 찾아오자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은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시골 마을의 풍경으로 변했다. 이 고요함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했다. 상상이었지만 이날은 독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도 없고, 저녁 하늘엔 뼈를 태운 화장터의 잿가루도 날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위안했다. 날이 맑아 별들이 반짝거렸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아우슈비츠 박물관에는 희생자들의 신발 11만켤레와 이름이 적힌 가방 2100여점, 그 밖에 안경과 수용소로 이송된 여자들에게서 잘라낸 2톤가량의 머리카락 등 유품이 보관돼 있다. 오시비엥침/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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