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홍인혜 | 시인
건강검진을 앞두고 있다. 돈을 더 내면 기본검진 외에 추가검사를 할 수 있다기에 무엇을 택할지 고민하는 중이다. 옵션 하나를 찔러 넣을 때마다 상당한 비용이 더해지는지라 온갖 것을 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땐 평소 미심쩍었던 부분이나 가족력을 고려하게 된다. 원체 장이 안 좋았으니 대장 내시경을 해볼까 고민하다가도, 성인병 몇개를 갖고 계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인슐린 저항성 검사를 해봐야 하나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과연 심장은 괜찮을까, 폐는 멀쩡한가 등등 오장육부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다. 실제 문제가 있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고 지금 발견하면 잔병으로 끝날 수 있는데, 애먼 곳을 들쑤셔보는 걸까 봐 걱정이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운명을 건 확률 타진이다. ‘만약 나에게 몹쓸 병이 들이닥친다면 어디로 찾아올 가능성이 높을까’를 고심해야 한다. 일단 올해는 장에 얼마를 태우고 내년에는 척추에 얼마를 걸어봐? 인생에 있어 확률을 따지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얼마 전 은행에서 정기예금이 만기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은행은 나에게 더 이율이 좋지만 위험부담도 높은 상품을 권했다. 또다시 확률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 투자가 쪽박을 찰 가능성은? 사실 나는 간이 작아 고민해봐야 결국에는 정기예금을 택할 테지만 그 와중에도 궁리할 게 많았다. 이를테면 6개월짜리 상품이냐, 1년짜리 상품이냐. 당연히 장기 상품의 이율이 높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1년 안에 이사 갈 일이 생긴다면? 내가 목돈이 필요해 예금을 중도 해지할 확률은?
확률을 재고 따지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틀 전 함께 점심을 먹은 친구였다. 그가 다급하게 말하길 가까운 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는 자신이 밀접접촉자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밀접접촉자와 식사를 한 너도 몸 상태를 예의 주시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억울하다’였다. 나는 출퇴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근래 많은 사교 활동을 끊고 외톨이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주를 칩거하다 실로 오랜만에 딱 한명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전염됐을지 모른다니!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려 티브이(TV)를 켰는데 예능 프로그램에 큰 병을 앓았던 사람이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병증을 발견하고 처음 했던 생각은 ‘억울하다’였다고 한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문득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전세 사기에 휘말려 전세금을 모두 날릴 뻔했던 시절에 늘 되뇌었던 말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였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확률적으로 적은 일이 나에게만.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글귀가 있다. 인간이 ‘와이 미’(Why me?)라고 물으면 신은 ‘와이 낫’(Why not?)이라고 답한다는 글. 인간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져야 하죠?’라고 물으면 신은 ‘그런 일이 너에게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뭔데?’라고 답한다는 말이다. 그때는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인간은 내가 어디가 아플지 가능성을 타진하며 몸 관리를 하고, 몇살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돈을 모으고, 병에 전염될 확률을 낮추고자 애쓰지만 신의 확률표는 그 모든 것과 딴판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물론 내가 ‘어차피 우리의 노력은 부질없으니 마구잡이로 삽시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확률을 타진하며 불운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문득 멈춰 서서 떠올린다. 나의 논리, 나의 셈법과는 다른 차원의 확률을. 그 앞에 겸허해지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