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후보는 안 된다는 시중의 담론에 정서적으로는 동조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리 동의하지는 않는다. (…) 나의 헌법상의 권리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비록 다시 헛된 희망고문이 될지라도, 단 1퍼센트라도 이 암담한 현실과 맞설 의지가 보이는 쪽에 표를 던지는 시시포스의 노고를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사상 최악의 대선이라고들 한다.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최악이라 예단하는지 모르겠다. 내겐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가 당선될 때가 최악이었다. 굳이 최악을 논하자면 아마 그렇게 몰고 가는 언론들의 수준이 그럴 것이다. 설사 최악이라 한들 5년마다 한번씩 대통령을 바꿔서 새로운 대통령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숙명일진대, 그 중요성까지 최악일 수는 없다. 이 선거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지금처럼 주로 후보들의 인성이나 자격을 둘러싼 온갖 마타도어와 가십만이 난무하는 저열한 수준으로 간다면 오히려 그것이 바로 이 대선을 최악이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본말 전도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든, 그리고 그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이 어떻든 그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표일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선거 이후 최소 5년간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번 대선이 다음과 같은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제들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내딛는 첫 발자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통치 25년이 낳은 양극화와 불평등의 해소, 둘째, 기후위기에 대한 비상한 대처, 셋째, 한계에 이른 성장주도 경제 프레임의 변환,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구축 등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인권 증진 및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의 확충, 세대 및 젠더 갈등 같은 과제는 첫째 과제와 연결되며, 4차 산업혁명 대응, 그린성장 같은 과제는 둘째와 셋째 과제에 두루 걸쳐 있고, 자주국방이나 외교 문제는 네번째 과제의 하위 과제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과제 인식 아래서 이번 대선 주요 후보들의 대표 어젠다를 검토해보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대표 어젠다는 ‘대전환’과 ‘공정성장’이다. ‘대전환’이라는 어젠다에는 추상적이나마 양극화와 기후위기 극복이라는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고, ‘공정성장’은 나름 그 방법론일 것이다. ‘공정’은 양극화 해소 과제와 연결될 것이고, ‘성장’은 디지털, 그린산업 등을 통한 성장률 제고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공정성장’ 어젠다가 토지보유세 징수를 통한 기본소득제를 야심차게 내걸고 출발한 그의 비전과 잘 어울리는 어젠다일까. 특히 재임 중 상당한 고성장을 약속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인 저성장 기조에서 그 가능성이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무리한 고성장론은 결국 기업우선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성장과 분배의 두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는 이미 낡아빠진 낙수효과론의 재판일 뿐 결코 신자유주의체제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는 우리 사회 구성원 90%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정의로운 처방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대선국면용이라 할지라도 그로부터 진정한 대전환의 모멘텀을 얼마간이나마 기대했던 나로서는 적이 실망스럽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대표 어젠다는 ‘정권교체’다. 그저 권력을 뺏어오고 싶다는 유아적인 권력욕의 표현만이 아니라면 여기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즉, 우선 현 정권의 지난 5년 동안의 통치가 확실하게 실패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하며 또 자신들이 이 실패를 확실하게 뒤집어 위에서 제시한 우리 시대의 주요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비전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 정권은 성공하지 못한 정권이다. 그것은 촛불정권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한 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아온 구 기득권 세력의 확실한 청산과, 지난 신자유주의체제 20여년의 사회경제적 파탄의 청산이라는,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이중의 청산이었다. 하지만 현 정권은 집요한 저항에 밀려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지도 못했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담대한 기획을 실천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현 정권의 의지와 역량의 부족이기도 했지만 조국 사태가 말해주듯 이미 그들 자체가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서 기득권층으로 편입했다는 뼈아픈 한계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득권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체제와의 여전한 밀월 관계, 기득권층과 서민층의 요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부동산 정책 등은 그러한 실패의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는 구호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남은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미온적 대처와 야심적으로 착수했으나 비운으로 끝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프로젝트 추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성공적인 대처와 그에 바탕을 둔 성장률의 안정적 지속, 그리고 선진국 그룹 편입과 한류의 주목할 만한 성취로 인한 국가신인도의 상승 등을 생각하면 매우 보수적 관점이기는 하나 과연 현 정권이 특히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비교할 때 그토록 저주를 받아 마땅할 정도의 부실정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게다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은 그 정체성 자체가 문제적이다. 이 정당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현장에서 애초에 사라졌어야 할 수구세력과 그나마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던 세력이 동거한 채로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에 기생하여 반사적으로 존립 중인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설사 운 좋게 집권하더라도 현 정권이 좌초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는커녕 과거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 게다가 그들은 나름 경력과 소신을 지닌 자당 내부의 후보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현 정권에 대한 배신 행위로 인해 얻은 명성을 이유로 아직 정치적 능력도 정체성도 제대로 검증받은 적이 없는 일개 검찰공무원 퇴직자를 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처럼 오로지 정권탈취 욕구 외엔 어떤 정치윤리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는 정당이 수권정당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후보는 안 된다는 시중의 담론에 정서적으로는 동조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리 동의하지는 않는다. 후보의 자질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 후보를 내세운 정당이나 세력의 성격이나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번 대선이 보수 양당 지배체제를 쌍끌이하고 있는, 무능한 거대 여당과 파산유예 중인 제1야당 간의 이전투구 이상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이 위중한 당면 과제들을 과감히 추진해나갈 대안적 정치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헌법상의 권리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비록 다시 헛된 희망고문이 될지라도, 단 1퍼센트라도 이 암담한 현실과 맞설 의지가 보이는 쪽에 표를 던지는 시시포스의 노고를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