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차별과 임금 체불에 시달리던 구식군대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의 뒷배를 봐주던 민 왕후를 죽이겠다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가까스로 달아나 충청도에 숨어 있던 민 왕후에게 어느 날 한 무당이 ‘신령님이 알려줬다’며 찾아왔다. 무당은 50일 안에 궁궐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한달 만에 환궁할 수 있었다.
무당에게 혹한 민 왕후는 ‘관우의 딸’을 칭하는 무당을 위해 사당 관왕묘를 지어주고, 왕자나 공신에게 주는 ‘군’의 칭호까지 내렸다. ‘진령군’은 국정과 인사에 깊이 개입하는 숨은 실세가 됐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장차관급 인사들도 앞다퉈 진령군에게 아부했고, 누님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비선 실세’는 존재 자체로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흔든다. 직선 대통령들의 지지율이 정권 말이면 다 추락했지만, 유독 박근혜씨가 임기 중 탄핵을 당한 것도 비선 실세 탓이 컸다. 최순실(최서원)은 대통령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사람이었으니, 국민이 몰아낸 것은 ‘가짜 대통령’이란 말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번 대선에 나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주변에도 비선 실세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법사·도사로 불리는 이들이 한 부류다. 정부·여당이 ‘무주택자들이 집 가진 사람 횡포에 시달리게 해서 표를 얻으려고 일부러 집값을 올렸다’든가, ‘광주 시민들이 좋은 물건에 관심을 가져 투쟁 능력이 약화될까봐 복합쇼핑몰 유치를 막았다’든가, ‘탈원전 정책은 태양광 패널을 만드는 중국을 위한 것’이라든가, 논리가 황당한 말들을 후보의 입에서 나오게 만드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이도 있다.
언론에 등장하는 ‘윤석열 후보 쪽 핵심 관계자’(윤핵관)는 다른 부류다. 지난 1월 윤 후보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갈등이 수습되면서 사라진 듯했던 ‘윤핵관’이 최근 다시 등장했다. 이태규 국민의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장제원 의원하고 ‘(후보) 두분이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윤핵관’이라고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던 장 의원이 단일화 물밑 협상 파트너였다는 것이다. 윤 후보도 27일 기자회견에서 선대본부에 아무런 직책이 없는 장 의원이 단일화 협상 전권 대리인이었다고 밝혔다. 비선 실세는 쉽게 밀려나지 않는 법이다.
정남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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