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어느 회사 창고에 있던 태블릿 피시(PC)가 내 손에 굴러 들어왔다. 10년 전에 나온 구닥다리여서 요즘 앱은 깔리지도 않지만, 나는 작은 스케치북이 생겼다며 그림을 그리고 논다. 필압 감지 펜은 연동이 안 돼 손가락으로 낙서나 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정말 마음에 드는 기능이 있다. 지우개다. 수전증이 심한 손가락이 엉터리 붓질을 해도 곧바로 흔적 없이 지워준다. 그러니 마음껏 그리고 지운다. 이런 지우개를 세상 모든 일에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코끼리를 떠올리고 만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정치적 프레임에 속지 말자며 내놓은 비유인데, 요즘은 긍정 심리학의 반찬이 되어 돌아다닌다. “장애물을 피하려면 오히려 부딪혀요. 아예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머릿속에 코끼리를 떠올려버렸나요? 코를 지우세요. 지워졌나요? 이번엔 귀를 지워요. 다음엔 몸을.” 우리 머릿속에도 분명 지우개가 있다. 제각각 성능의 차이는 있지만.
올림픽 시즌이면 모두의 심장 박동수가 증가한다. 나는 볼 수도 없어 티브이(TV)를 꺼버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태연히 움직이는 선수들의 비결은 뭘까?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선수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상상력이 좋은 편이라 그냥 벽을 쳐버려요. 상대편도 지우고 저랑 과녁만 있는 큰 방을 하나 만들어요.” 이 말이 참 좋았다. 흔히 ‘집중력’이라고 하는 걸 ‘상상력’이라 말한 게 정곡을 찔렀다. 주위가 산만하고 쉽게 흥분하는 경주마는 앞만 볼 수 있게 눈가리개를 씌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도구 없이 상상만으로 세상을 지울 수 있다.
다시 코끼리로 돌아가자. 당신 머리에 코끼리가 나타날 때 그 녀석은 털과 주름, 진흙 묻은 발가락을 가진 존재였나? 아니면 만화처럼 단순하게 그린 코가 긴 짐승이었나? 아마도 후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우리 머리는 잘 지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떠올리기보다는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지운다. 안산의 말처럼 상상력이 뛰어나면 더 잘 지운다.
예술이란 세상에 없는 걸 창조하는 걸까? 내 생각은 다르다. 화가는 작은 액자 바깥의 세상을 지워버리고 딱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남기는 사람이다. 영화감독이 주인공의 인생 곡절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관객의 하품을 자아낼 뿐이다. 오히려 덜 보여줘야 궁금하다며 달려든다. 특히 만화가는 지우기의 달인이다. 처음엔 복잡한 선으로 인물들을 스케치하지만 군더더기를 줄이고 줄여 딱 필요한 선만 남긴다. 독자들은 저마다의 상상으로 빈 곳을 채우며 마치 자신이 그 캐릭터가 된 것처럼 몰입한다.
내 머릿속의 코끼리가 귀여운 덤보가 아니라 정말 두렵고 떨쳐버리고 싶은 존재라면 어떻게 할까? 단번에 지우기 어렵다면 살살 밖으로 빼내보자. 말 통하는 사람을 만나 고민을 말해본다. “어 그래? 나도 예전에 머릿속에 매머드 두 마리가 셔플 댄스를 추면서 쿵쾅댔거든.”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기장이나 에스엔에스(SNS)에 푸념하거나, 좀 더 단정하게 ‘내 머릿속의 코끼리’라는 글을 써보아도 좋다. 그렇게 코끼리를 머리 밖에서 마주 보면 막연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없애지는 못해도 길들이고 다룰 수 있는 존재로 바꿀 수 있다.
요즘 나는 세상이라는 큰 코끼리를 지우개로 다듬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가지거나 경험한 걸로 그 삶을 판단한다. 반대로 가지지 않거나 하지 않는 걸로 나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카카오톡을 지웠고, 자동차를 가진 적 없고, 배달 음식을 시켜먹지 않지만 잘 살아 있다. 세탁기는 지웠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보다 없는 것과 지운 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