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2006). 위키미디어. (C)Wild+Team Agentur-UNI Salzburg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정치 이야기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금기라고 하는데 요즘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금기가 되는 중인 듯하다. 모두가 조심하는데도 기어이 뭔가 신랄한 논평을 꺼내고야 마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차로 사적인 관계에 생길 위험보다 상대를 계몽시켜 생기는 공익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 좋겠지만, 계몽이 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정치에 관한 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반면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건 한두 마디면 충분하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모든 말들이 잊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글을 남기는 작가는 예외지만 말이다.
단 한번이었든 평생의 정열이었든, 어떤 기회에 정치에 개입한 것이 불행한 선택이 되어 버린 작가들은 문학사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 불행한 선택에는 자질이 모자라는 정치가를 지지하는 것에서부터 독재자나 억압적인 체제를 열렬히 옹호 찬양하는 것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겠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범인 밀로셰비치가 2006년 수감 중 사망했을 때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는 그를 ‘나의 친구’라 부르며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계가 놀랐다.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자 우리가 잘 아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두 손 놓고 자전거 타기/ 아스팔트 위에 찍힌 타이어 자국’ 같은 시적인 대사를 썼던 한트케와 밀로셰비치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많은 이들이 한트케가 노벨문학상 티켓을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고 생각했다.(2019년 한트케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예상은 틀리게 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수상에 분개했다.) 다만 한트케가 밀로셰비치 장례식 때 발표한 짤막한 추도사는 읽어볼 가치가 있다. ‘세계는, 이른바 세계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세계는, 이른바 세계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른바 세계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나는 진리를 모른다. 단지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한다. 나는 질문한다. 이것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밀로셰비치 옆에 서 있는 이유이다.’
밀로셰비치가 이런 대접을 받을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한트케의 이 추도사는 ‘작가의 불행한 정치적 선택’ 시리즈 중 가장 세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모르며, 진리가 명해서 여기 온 게 아니라 오직 개인 자격으로 온 것임을 분명히 했다. 자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상에서 명분을 꿔 올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리를 알고 모든 것을 아는’ 세계를 우습게 만들었다. 물론 이 일은 오직 한트케 개인의 일이기에 누구도 그를 따라 할 수 없다.
한트케의 이런 전략은 작가들이 보통 정치적인 의견을 표할 때 사용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것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선택이 세계의 진리(‘역사’ ‘민족’ ‘상식’)와 합치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듣는 시민들이 당연히 이에 따르기를 기대하니 말이다. 그렇게 쉽게 행해지는 진리 주장이 실제로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이런 식의 담화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이를 선거 때마다 찾아오는 일상적인 풍경의 하나로 여기게끔 되었다.
우리 모두가 진리를 안다면 선거가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우리 중 일부가 진리를 안다면 선거는 진리와 거짓의 대결장이 된다. 두 경우 모두 민주국가의 선거와는 맞지 않는 그림이다. 한트케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우리가 선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늘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의사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의미가 있다면, 다음 5년 뒤에 우리 판단을 다시 확인해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지 진리와 일치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