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김진철 | 책지성팀장
“그냥 싫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그냥 싫다는데 논리적 근거를 요구할 수도 없는 일. “생긴 것도 싫고 말투도 싫고 손짓 발짓 몸짓 숨소리까지 싫다니까.” ‘비호감’은 매우 강력한 감정이다.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사라진다. 무엇 때문에 싫은가조차 생각해볼 필요가 없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감도 대체로 맹목적이다. 비호감과 함께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감정이어서, 딱히 명징한 판단에 기반하지 않는다.
정치와 선거에도 감정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선거마저 ‘역대급 비호감’이라고 규정된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싫다는 감정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반면에 한국 사회는 강렬한 정치 팬덤을 경험해왔다. ‘대깨문’이니 ‘태극기부대’니 자랑스럽게 자칭하며 극렬과 열혈, 적극과 극단을 넘나드는 현상은 몇 년 동안 무척 뜨거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정 정치인에게 바쳐지는 뜨거운 애정과 맹목적 지지는, 개별적으로 따져볼 여지는 있지만, 웬만한 연예인을 향한 팬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역대 최고의 정치 팬덤 현상의 일차적 귀결이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 아닌가 싶다. 맹렬한 추종의 감정이 반대 방향을 향할 때 강력한 비호감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팬덤이 그렇듯, 비호감 역시 물음과 판단 없이 전개된다. 팬덤의 열광적 지지 이면에는 반대를 위한 선택이 남을 뿐이다.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호감의 대상을 감정적으로 골라 배제하는 모양새다. 저쪽이 싫어서 하는 투표에는 저쪽만 아니면 된다는 기준만 적용된다. ‘너’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미디어다.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손쉬운 규정이 남발될수록 시민들은 나쁜 프레임에 빨려 들어간다. 비합리적 감정이 근거를 얻고 더욱 부풀어 오른다. 양비론은 한국 사회를 좀먹어왔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기 양비론이 즐겨 악용된 것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어용 언론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양비론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시민의 눈을 가렸다. 언론의 게으른 프레임 설정과 소셜미디어의 부풀리기에 영향 받는 시민들의 비호감은 더욱 확산하고 언론 불신도 함께 커져간다. ‘찍을 놈’이 아무도 없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더 나쁜 놈’은 더 크게 웃는다. 레거시 미디어(전통 매체)와 소셜미디어가 합동으로 일궈내는 ‘역대급’ 악순환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직관적이고 빠르게 생각해내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신중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대신 게으르고 주저하기 일쑤인 사람이 있다. 전자는 경험에 의존하고 후자는 기억에 의존한다.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 두 사람이 우리 머릿속에 공존한다고 설명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편향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 직관 사고틀이 비호감과 팬덤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경험적 자아는 판단 사고틀의 논리적 자아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인간은 대체로 직관을 활용하다가 잘 안 풀리면 판단을 가동시키는데, 판단은 겁이 많고 게을러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카너먼은 지적한다. 그렇다. 우리는 멍청하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지금이라도 거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육법전서와 혁명’에 담긴 김수영 시인의 한탄은 오늘도 유효하다.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선거판을 비호감 잔치로 흥청이게 하는 ‘그놈들’의 전략에, 게으르고 무능한 ‘그놈들’의 상업적 프레임에, 현실의 불만과 분노를 감정으로 해소하고 기분에 놀아나는 ‘불쌍한 백성들’이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최대 피해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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