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승강장에서 장애인권리예산 약속을 요구하며 지하철타기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박지영 기자
김소민 자유기고가
우아하다. 거리에서 구호 외칠 필요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뜻을 관철할 수 있다. 뭐가 불편한지 먼저들 물어봐준다. 대한민국 상위 2%만 낸다는 종합부동산세, 이재명 후보, 윤석열 후보 모두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이 종부세 부과 기준을 공시가격 9억원 이상에서 11억원 이상으로 완화해줬는데 모자라는가 보다. 보수 언론들이 “세금 폭탄”이라고 대신 외쳐줬다.
이렇게 욕을 먹다간 불로장생할 거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 말이다. 지난해 12월6일부터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대선 주자 2차 티브이(TV)토론회가 열린 지난 11일 오후 5시, 휠체어 대여섯대가 4호선 혜화역에서 줄줄이 지하철에 올랐다. ‘불법’ 시위 탓에 열차가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대선 주자들이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만하겠습니다.” 실시간 동영상으로 보고 있는데 채팅창이 욕설로 도배됐다. 그날 토론회에서 대선 주자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다. 전장연은 아침 8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욕을 먹고 “장애인 단체 시위로 지하철 지연”이란 기사들이 뜬다. 이 시위를 제일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은 전장연 활동가들일 거다.
“왜 시민을 볼모 삼냐. 국회로 가라.” 채팅창 욕설을 순화해 쓰자면 이렇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 추락사고로 숨진 뒤 투쟁 21년째다. 국회, 안 가봤겠나? 전장연은 지난해 12월20일엔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 집 앞까지 찾아갔다. 지하철이라도 줄줄이 타야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온다. 장애인단체들이 천막농성하고, 철로에 드러누운 뒤에야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교통약자법)이 제정됐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하나둘 생겼다.
약속이야 있었다. 2002년 서울시는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2025년까지 시내버스를 저상버스로 운영하겠다고도 했다. 당당 멀었다. 지난해 말 교통약자법이 개정되면서 약속은 추가됐다. 지켜질진 여전히 모른다. 개정안에서 정부가 장애인택시 등 특별 교통수단 시외운영에 예산 지원을 해야 한다던 ‘의무 조항’이 ‘할 수 있다’는 임의 조항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돈 없다 하면 그만인 셈이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죽어야 들린다. 약속이 유예되는 동안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장애인 5명이 지하철 리프트 추락사로 숨졌다. 장애인 권리와 관련된 법안들은 주검 위에 제정됐다. 1995년 3월8일 최정환 열사는 분신했다. 21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마비가 됐다.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불법’ 카세트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단속반원에게 스피커를 빼앗겼다. 생존이 ‘불법’이었다. 2002년 최옥란 열사가 음독해 숨졌다. 중증 뇌성마비가 있던 그는 “이걸로 한달 살아보라”며 당시 기초생활수급자 현금급여 28만6천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반납하고 죽었다.(책 <유언을 만난 세계>) 2005년 경남 함안군에 살던 근무력증 중증장애인은 자기 집에서 동사했다. 한파로 보일러가 터져 물이 차오르는데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목소리는 죽어서도 들리지 않을 뻔했다. 장애인단체 활동가들이 6시간 동안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너고 활동보조 제도가 도입됐다. 그때를 회상하며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는 웃으며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이고, 우리 투쟁은 왜 이렇게 만날 처절해야 해.”
“왜 이런 방식이어야 해?” 욕하는 사람들도 묻는다. 나도 궁금하다. 종부세 깎아주는 덴 발 빠르면서 이동권 보장하는 건 왜 이토록 더뎌야 하나? 왜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이토록 처절하게 싸워서 쟁취해야 하나?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