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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아우슈비츠는 왜 나치 수용소의 대명사가 되었나?

등록 2022-02-15 18:19수정 2022-02-16 02:31

제노사이드의 기억 폴란드 _02
나치는 강제수용소와 달리 절멸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비밀로 다뤘다. 종전 직전 독일군은 적이 도착하기 전에 수용소 시설물들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지만, 소련군이 너무도 빠르게 이곳에 당도하는 바람에 제대로 철거하지 못했다.

2017년 4월20일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한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이 75년 전 모습을 기록한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오시비엥침/김봉규 선임기자
2017년 4월20일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한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이 75년 전 모습을 기록한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오시비엥침/김봉규 선임기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4월 중순인데도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을 쓸어보니 파란 새싹이 많이 보였다. 새 생명이 추위를 뚫고 돋아나고 있었다. 숙소에서 수용소 입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길목에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묘비 같은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그 앞에 누군가 이른 아침에 가져다 놓은 꽃들이 싱싱해 보였다. 촛불도 놓여 있었다. 묘비의 글을 읽어보니 아우슈비츠 해방 막바지에 죽은 700명이 함께 묻힌 무덤이었다. 수용소 밖에도 희생자 묘역이 있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그 묘역 바로 옆에 100년 이상 자란 큰 나무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목 아래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수용소 매표소 근처 주차장엔 이른 아침인데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버스들로 북적였다. 코로나19 때문에 1년 중 98일 동안 폐쇄한 2021년에도 5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 쪽은 밝혔다. 팬데믹 전에는 매년 200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았다. 80% 이상이 외국인이다. 나는 지난 15년여 동안 국내는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학살터나 수용소를 찾아다녔는데, 방문객 수로만 보면 아우슈비츠를 찾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유가 뭘까.

지리적으로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수용소가 있는 곳은 체코와 인접한 폴란드 남쪽 외곽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버스로 10시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도 6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근처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1시간30분 거리에 크라쿠프 소금광산이라는 옛 유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로 좁혀진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가 세운 수많은 강제·절멸수용소 중 하나지만 다른 수용소에 비해 규모도 컸고, 무엇보다 당시 시설이 상당 부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멸수용소는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오로지 유대인만을 말살할 목적으로 세워진 곳인데 넓게는 강제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치는 강제수용소와 달리 절멸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비밀로 다뤘다. 종전 직전 독일군은 적이 도착하기 전에 수용소 시설물들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지만, 소련군이 너무도 빠르게 이곳에 당도하는 바람에 제대로 철거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거의 온전한 형태로 소련군에 접수된 배경이다. 나치 시절에 세워진 다른 수용소는 완전히 파괴되어 휑한 것과 달리, 이곳 아우슈비츠에는 악명 높았던 가스실과 화장터 등 시설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찾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유명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단체 관람객이 입장을 시작하자 나도 그 틈에 끼어 수용소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관람객은 왼쪽 가슴에 숫자가 적힌 큰 번호표를 붙이고 입장했는데 언뜻 수인번호처럼 보였다. 정문 근처 땅바닥엔 눈 녹은 물이 모여 물구덩이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물구덩이의 수면에 수용소 건물과 관람객이 거울처럼 투영되었다. 마치 75년 전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물구덩이 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구덩이에 닿을 정도로 아주 낮은 자세를 취해 수면 위아래 환영의 느낌을 찍어내려고 했으나, 헛된 생각이었다.

그 물구덩이를 지나자 수용소 정문 근처에 철조망과 당시 고압 전류가 흘렀을 전선이 감긴 철책이 세워져 있었다. 그 전깃줄과 철조망을 광각렌즈로 몇장 찍었는데 아무런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는 고압 전류가 흐르지 않는 그 철책들이 나를 가둘 수 없는 전시 조형물로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철책을 지나 20세기 최악의 강제·절멸수용소 가운데 하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철근을 구부려 만든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독일어 구호가 보였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가스실을 통한 대량학살도 벌어졌지만 ‘노동을 통한 절멸'도 이뤄졌던 수용소였기에, 그 구호가 더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강제노동을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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