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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가 기대하는 이미지

등록 2022-02-10 17:58수정 2022-02-12 17:07

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 왕립미술관.
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 왕립미술관.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대학가의 2월은 신입생을 맞이할 준비로 나름 분주하다. 내가 2월의 그림이라고 부르는 작품이 둘 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공지를 위해 만드는 포스터에 패러디로 자주 활용되는 그림으로, 하나는 뭉크의 <절규>이고, 또 하나는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1793)이다. 미술 문외한이 보더라도 이 두 그림의 주인공은 무언가 처절한 상황이라는 것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자체가 워낙 시각적 호소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거기에 간단한 메시지만 추가해도 포스터로 손색이 없다.

특히 <마라의 죽음>은 화면의 반이 컴컴한 빈 공간이어서 그 자리에 밝은 색깔의 글자로 메시지를 채워 넣기에 알맞다. 죽기 직전에 펜을 들고 마지막으로 무언가 전하려 한 듯 보이는 주인공의 얼굴 옆에 대학생들은 재치 넘치는 말풍선을 달아놓는다. “오티(OT)에서 제대로 배웠더라면 이런 봉변은 없었을 텐데…”라든가 “오티도 못 가보고 이렇게 죽어갈 순 없어…”라는 식이다.

마라는 군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법이던 절대왕정 시대에 공화정의 이상을 꿈꾸었던 혁명가이다. 그러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암살되고 만다. 자객은 마라와 같은 편인 것처럼 위장하고 집으로 쪽지를 전하러 온 젊은 여자였다. 무방비 상태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마라가 쪽지를 건네받고 펼쳐보는 허술한 틈새를 노려 그녀는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그를 찔렀다.

“마라가 암살되었다!” 당시 이 말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멀리서 애도와 분노의 심정으로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평소에 지독히도 고생하던 피부병이 온몸에 번져 있는데다 목욕물에 퉁퉁 불어 있었던 마라의 시신은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질 만큼 끔찍하고 초라했다. 죽은 이를 직접 보러 온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장례식 직전까지 관을 열어두어 대중에게 마라의 얼굴을 공개하려던 계획은 취소해야 했다.

마라의 절친한 친구이던 화가 다비드는 서둘러 그림을 그려 마라의 신체를 대신하고자 했다. 다비드는 처참한 피투성이 시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모두를 대신한 거룩한 죽음으로 묘사했다. 영웅적 인물에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영웅다운 이미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화면의 반을 어둡게 처리하여 침묵 가운데 장엄한 느낌을 주면서, 늘어져 있는 창백한 시신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시선을 집중시켰다.

목욕하다 기습당한 시체가 이렇게 연극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은 마라는 마치 막 십자가에서 내려져 축 늘어진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혹은 죽은 채 성모의 무릎 위에 처져 있는 ‘피에타’의 그리스도처럼 보였다. 마라의 죽음이 어이없이 당한 살해가 아니라 위대하고 슬픈 희생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죽음 이미지를 끌어온 것이다.

어떤 인물이 만인에게 마음속의 영웅으로 자리 잡으려면 영웅다운 행동 못지않게 영웅다운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왕의 초상화를 그렸던 옛 화가들은 비범하고 웅장하며 고귀한 이미지로 왕을 연출해왔다. 오늘날 전세계의 통치자들과 대통령 후보자들 역시 공인답게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내면의 멋이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이미지로 보급되고 있다. 국민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그런 지배자의 이미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웅은 실체였다기보다는 이미지가 입혀진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나 행동이 아니라 이미지이므로, 이미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기대하는 이미지만을 보려 하면, 볼 수 없는 눈먼 부분이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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