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홍인혜 | 시인
슬며시 시들어가던 새해의 흥이 설날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이맘때 우리는 다양한 신년계획을 세운다. 나의 2022년 계획 중 특이한 것으로는 영어 수업이 있다. 영어 공부라, 숱한 사람들이 가슴에 품곤 하는 흔한 목표지만 나의 영어 수업은 조금 다르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인 중에 일찌감치 영어에 흥미를 잃고 배움을 놓아버린 이가 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아이들은 아장아장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어른들도 영어 점수를 높이느라 애쓰는 시대다. 유명한 카페의 메뉴판은 온통 알파벳이고 새 아파트의 이름은 다양한 영단어로 나날이 길어지는 시절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통해 깨달았다. 영어를 전혀 못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더라는 사실 말이다. 지인은 요즘 핫한 업계에 있는데 능력을 뽐내며 회사를 잘만 다니고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외국인을 만나 말문이 막힐 때, 좋아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때 그는 ‘이젠 남의 나라 말 하나쯤 익히고 싶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올해부터 내가 그를 가르치기로 했다. 내 영어 실력이 남을 가르칠 만큼 탁월하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그저 지인이 진작 놓아버린 영어를 정규교육 기간 내 붙들고 있었던 정도다. 그래도 여행을 좋아해서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근 몇해 바이러스에 발이 묶이고 영어를 쓸 일이 없다 보니 점차 혀가 굳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가 과외 선생을 자처한 데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 타인을 가르치는 것이 내게도 공부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매주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나는 요즘도 운동 레슨, 기타 수업을 듣고 있어 배우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가르치는’ 것은 신선한 도전이었다. 지난 한달 선생 아닌 선생이 되어 느낀 세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가르치는 것은 실제로 엄청나게 공부가 된다는 사실이다. 내 머릿속에도 어룽어룽 난삽하게 흩어져 있는 개념을 남 앞에 유려하게 설명하고 잘난 척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누구보다 확실히 알아야 했다. 학생이던 시절엔 억지로 공부를 시작해 대충 마무리하곤 했는데 선생이 되자 학생의 돌발 질문 앞에 권위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저절로 공부에 파고들게 되었다.
두번째로 깨달은 건 학생이 태만하면 선생도 기운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금전적으로 계약된 관계가 아니므로 지인이 수업에 늦는다거나, 공부에 소홀했음을 들키면 자연스레 생각이 이렇게 흘러갔다. ‘이 수업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성인 대 성인이므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비싼 돈을 주고 끊은 피티(PT)를 빠지기 아까워하는 것처럼, 이 수업도 가치롭게 생각해달라고. 호의로 시작한 수업이라고 허투루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지인은 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성실하게 수업에 임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세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누군가의 태도를 바꾸고 세계를 확장시켜준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값진 경험이라는 사실을. 지인이 요즘 길 가다 모르는 영어 간판이 나오면 사전을 찾게 된다고 말했을 때, 회의 시간에 흔하게 쓰던 영단어가 이 뜻이었구나 알게 되어 속 시원해했을 때, 어제 본 미국 드라마에서 대사 한 줄이 귀에 쏙 들어왔다고 기뻐할 때 나 역시 짜릿하고 충만했다.
이렇게 우리의 수업은 정답고 진지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도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다. 신년 목표로 보통 꼽곤 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기 혹은 무언가 배우기 외에도 ‘남을’ 위해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보면 어떻겠냐고. 요리, 목공, 뜨개질, 스마트폰 다루기 뭐든 좋다. 배우는 것 이상으로 가르칠 때 열리는 세계를 당신도 맛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