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해 9월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최영홀에서 열린 ‘청년 곁에 국민의힘!' 행사에 참석해 학생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다이내믹 도넛]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젠더 의제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20대 남성’을 나는 다른 청년과 구분해 ‘활성 이대남’이라 부른다. ‘활성 이대남’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혐오의 확산,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활성 이대남’보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기성 정치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20대 여론에 따라 대선판 전체가 출렁댄다. 특히 윤석열 후보의 경우 20대 남자, 소위 ‘이대남’의 향배에 따라 지지율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유력 후보들과 정당들은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납작 엎드리지만, 사실 이들이 귀 기울이는 건 여성을 포함한 청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안티 페미니즘’을 외치는 일부 남성의 주장이다. 이렇게 ‘젠더 의제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20대 남성’을 나는 다른 청년과 구분해 ‘활성 이대남’이라 부른다.
현상은 새로울지 몰라도, ‘활성 이대남’의 존재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안티페미니즘’ 기치를 걸고 극단적 인식과 행동을 보인 20대 남성 집단은 과거에도 있었다. 오래전, 대학 페미니즘 매체를 향한 ‘이대남’의 전국적 사이버 불링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른바 ‘월장 사태’다. 2001년 무렵 일임에도 2022년 사건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양상이 비슷했다. 여성부가 처음으로 설립되고 동시에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부 폐지론’이 터져 나오던 시절이다. ‘구 활성 이대남’들이 이제는 40대가 됐다. 놀랍게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 불린다. ‘활성 이대남’의 출현은 이념적 진보냐 보수냐라는 문제와 크게 상관이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활성 이대남’의 인식이 평균적 청년 남성의 그것과 명확히 다르다는 점이다. 20대 남성은 내부 동질성이 어떤 세대에 비해도 낮게 나타난다. 이 점은 여론조사나 통계를 통해 거듭 확인됐다.(2019년 <시사IN> ‘20대 남자’ 특집, 2021년 <한국방송>(KBS) ‘세대인식 집중조사’) ‘86세대’ ‘엑스(X)세대’ ‘엠제트(MZ)세대’ 등 각각의 세대 집단은 같은 정도로 동질성을 갖지 않는다. 쉽게 말해 20대끼리 서로 닮은 정도와 60대끼리 닮은 정도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동질감이 가장 큰 집단의 대표적 예는 전쟁에 참가해 함께 피를 흘린 ‘징병세대’다. 생사를 넘나드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공유하기에 이들의 사고방식은 정치적 선택에서도 강하게 동기화될 공산이 크다.
오늘날 한국의 20대 남성은 다른 세대보다 훨씬 균열되어 있다. 특히 소득이나 계급에 따른 인식 차이가 크다. 그들은 각기 찢어지고 고립된 개인들이며, 그중 일부는 자신의 정체성 공백을 페미니즘이라는 공동의 적을 통해 메우고 있는 중이다. 이 강한 적대감이 세대적 동질감을 그나마 유지하는 요소의 하나다. 그런데 다른 세대 집단에 비해 왜 ‘이대남’ 내부의 이질성이 유독 클까?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역량을 집중해 풀어내야 할 숙제다.
예전엔 입에 발린 말일지언정 정치인들이 “국민 통합”이란 말을 자주 썼다. 잘살든 못살든, 남자든 여자든 다 같은 국민이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선 후보, 원내 정당 대표라는 자가 대놓고 여성혐오 정서에 올라타 시민들을 서로 반목시키려고 혈안이다. 정치인이란 존재가 원래 사악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발달한 여론조사 기법과 통계들이 그런 ‘갈라치기’가 단기적으로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보이기 때문이다. 분열의 정치는 도저한 실용주의, 이익이 되면 뭐든 한다는 ‘상인의 현실감각’이 정치판을 지배하며 나타난 필연적 귀결이다.
“‘이대남’ 여론이 곧 20대 여론”이라는 주장은 물론 오류지만, “‘이대남’은 과대 대표된 허상”이라고 싸잡아 무시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정치 고관여층은 저관여층보다 더 큰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리하여 현실정치 구도를 실제로 바꾼다. 더 활발히 정치활동을 하는 시민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먹고살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신체적·환경적 장애 때문에, 혹은 또 다른 이유에서 활발히 정치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요구가 묵살되거나 턱없이 과소평가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정치 고관여층 요구가 그러지 못하는 시민의 요구를 묵살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민주주의 가치와 문화는 근간에서부터 무너지고 만다.
‘활성 이대남’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혐오의 확산,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활성 이대남’보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기성 정치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