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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을 만나러 가다

등록 2022-01-25 18:41수정 2022-01-26 02:32

제노사이드의 기억_폴란드 _01
저물녘에 열린 추모식이 끝나자, 수용소 철탑에 조명이 켜졌다. 참석자들이 수용소 내 철길을 따라 추모비 앞으로 걸어왔다. 그 철길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희생자들을 실어나른 경로이기도 하다. 해 진 뒤 하늘의 어둠은 검은색이라기보다 짙은 남색에 가까워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2020년 1월27일(현지시각) 나치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해방 75주년 추모식이 열리는 동안 생존자들의 모습이 수용소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들 뒤편으로 수용소 감시 초소가 보인다. 오시비엥침/김봉규 선임기자
2020년 1월27일(현지시각) 나치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해방 75주년 추모식이 열리는 동안 생존자들의 모습이 수용소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들 뒤편으로 수용소 감시 초소가 보인다. 오시비엥침/김봉규 선임기자

27일이면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가 해방된 지 77주년을 맞는다. 매년 1월27일에 추모식이 열리는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소수 인원만 참석해 온라인으로 중계한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밝혔다. 이곳 아우슈비츠도 코로나19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2020년 1월에 열린 75주년 추모식에 다녀왔는데 2017년 4월에 이은 두번째 방문이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치닫기 직전이었다.

75주년 추모식에 다녀온 이유는 생존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인터뷰는 아우슈비츠 박물관 쪽에서 마련해줬는데, 추모식 바로 전날에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폴란드 항공사로부터 ‘항공기 결항’이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낭패였다.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추모식에 참석하는 생존자들을 먼발치에서라도 보려면 가야 했다. 결국은 하루 늦게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와 크라쿠프를 거쳐 오시비엥침(독일어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신청한 프레스카드를 수령하기 위해 이른 아침 미디어센터를 찾았는데, 갑자기 경호원들이 수용소 입구를 통제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공식 추모식에 앞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몇 분과 함께 가스실 앞에서 헌화를 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어서였다. 나는 프레스카드를 받고 난 뒤 숙소로 돌아와 저녁에 시작하는 추모식 행사를 대비해 옷가지와 먹을 것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생존자들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니 내가 취재할 현장이 궁금해졌다. 행사 시작은 늦은 오후였지만, 추모비 근처를 미리 조금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바로 옆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는데 추모식은 비르케나우 입구 ‘죽음의 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여러 번의 보안 검색을 마치고 나서야 추모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받은 프레스카드로는 실내 공식 행사 취재는 불가능했고, 오직 추모비 앞 제한구역에서만 취재가 가능했다. 나는 생존자들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와 추모식 시간대의 조명·노출 등을 예측했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려고 하니 경호원들이 절대 나갈 수 없다며 막아섰다. 이날만큼은 행사장에 한번 들어오면 추모식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시간 가까이 사각 철제 펜스 안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것이다. 카메라를 챙겨서 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한참을 추위에 떨고 있는데 행사 시간에 맞추어 들어온 한 외신기자가 나에게 비스킷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이 점심이고 저녁이었다. 그때쯤 허리 굽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가족과 자원봉사자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에서 내려 걸어왔다. 행사에 앞서 추모비를 찾은 것이다. 대부분 90살을 넘긴 생존자들은 수용소 당시 입었던 수인복을 상징하는 푸른색 줄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한 손엔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왼쪽 팔뚝에는 수감번호가 여전히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실내 추모식은 수용소 경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었다. 18살에 수용소로 끌려온 마리안 투르스키는 생존자를 대표한 인사말에서 “누군가 역사를 두고 거짓말을 하거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과거를 이용하려 할 때 무관심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이곳에 끌려온 어린이 5천명 중 가장 어린 생존자였던 토바 프리드만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아는 많은 아이가 오븐(주검 소각로)에 들어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며 “오늘 이곳에 있지 않은 모든 아이를 대표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과거를 잊지 말아달라”는 메시지였다.

저물녘에 열린 추모식이 끝나자, 수용소 철탑에 조명이 켜졌다. 참석자들이 수용소 내 철길을 따라 추모비 앞으로 걸어왔다. 그 철길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희생자들을 실어나른 경로이기도 하다. 해 진 뒤 하늘의 어둠은 검은색이라기보다 짙은 남색에 가까워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 색을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나로선 불가능했다. 낮밤의 기온차로 살짝 안개가 피었는데, 철탑의 불빛이 흩어지면서 아른거렸다. 이 모든 게 영화 세트장 속 풍경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이곳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비롯해 폴란드인, 집시, 소련군, 장애인 등 약 110만명이 학살되어 잿가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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