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대 의료진이 중증 심장병 환자에게 돼지의 심장을 이식하는 장면이다. 메릴랜드대 의대 제공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2011년 10월5일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직후 출간된, 월터 아이작슨이 쓴 전기 <스티브 잡스>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장면은 간 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잡스와 아내의 모습이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드는 순간 다행히 차례가 와 이식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그 정도 부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장기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때를 놓치면 죽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는 잡스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1950년 미국에서 처음 신장이식 수술이 성공했고 1960년대 면역거부반응을 막는 면역억제제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장기이식 시대가 열렸지만 이후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장기이식 생존율이 높아졌을 뿐 잡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증자의 존재가 결정적인 변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대기자의 3분의 1은 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7일 돼지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했다는 놀라운 뉴스가 나왔다. 미국 메릴랜드대 의학센터는 부정맥이 심해 인공심장 수술이 안 되고 법적 문제로 사람 심장을 이식받을 수도 없어 죽음을 앞둔 57살 남성 데이비드 베넷에게 돼지 심장을 이식했다고 밝혔다. 환자는 아직까지 큰 문제 없이 회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지난달에는 뇌사자 두 명에게 돼지 신장을 이식한 뒤 호흡기를 뗄 때까지 제대로 작동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동물 장기 이식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1905년 프랑스에서 만성신장질환을 앓던 아이에게 토끼 신장 조직을 이식했고 신장 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환자는 16일 만에 사망했다. 그 뒤에도 몇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패턴은 비슷했다. 면역학의 발전으로 면역거부반응의 원리가 규명되면서 동물 장기 이식은 무모한 시도였음이 드러났다.
반세기가 지나 면역억제제가 나오면서 동물 장기 이식 시도가 재개됐지만, 침팬지 신장을 이식받고 9개월을 산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약물로 해결하기에는 동물과 사람은 너무 달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크리스퍼/캐스9이라는 유전자편집 기술이 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이 기술로 게놈에서 면역과 관련된 유전자 9개를 조작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했고, 이식된 심장이 자라지 못하도록 성장호르몬에 반응하는 유전자를 비활성화한 돼지를 만들었다. 기존 유전자조작 기법으로 유전자 10개를 바꾼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장기이식용 돼지는 미국 기업 리비비코어의 작품이다. 현재 이 회사는 연간 수백마리의 돼지를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을 짓고 있다. 동물 장기 이식 시대가 열릴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