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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립의 이유와 창작의 동력

등록 2022-01-16 18:23수정 2022-01-17 02:31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제주에서도 배를 타고 10여분을 또 가야 하는 섬, 가파도는 눈에 띄는 오름 하나 없다. 전봇대도 없이 딱 트여 평평한 게 특징인 섬이다. 오후 4시에 마지막 배가 관광객과 도민을 태우고 제주로 떠나고 나면 남은 섬은 적막해진다.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입주했던, 마라톤을 즐기는 유명한 소설가에게 가파도에서 달리기는 하셨느냐 물었다. 조용한 섬에 본인의 발이 땅에 닿는 소리만이 너무 크게 울려 퍼져서 한 번밖에 달리지 못했단다. 그 대신 고요한 섬은 달리기가 어려운 만큼 소설을 쓰기에는 아주 좋았더란다.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 떠나고 거주하는 사람만 남은, 모든 움직임과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뻥 뚫린 섬. 그래서 내게 가파도의 밤에 대한 이미지는 적막하고 깜깜한 섬에 멀리서 보이는 불 켜진 작업실이다. 물론 밤의 가파도는 경험이 없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라 불리는 한경면 저지리도 섬은 아니지만 특유의 조용함이 있다. 도시와 비교해 확연히 적은 이동차량과 유동인구가 저절로 차분한 공기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경면 인근에만 서로 다른 성격의 아티스트 레지던시가 3개나 있다. 폐교였던 곳을 창작스튜디오로 만든 예술곶 산양에는 일곱 팀의 시각예술가가 입주하고, 김창열미술관 창작스튜디오와 제주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는 각 한 팀의 예술가가 입주한다.

가파도와 한경면의 레지던시 모두 복잡한 도시에서 툭 떨어져 나간 한갓진 곳에 위치한 진짜 섬, 혹은 섬처럼 고립된 공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가들에게 고립 혹은 고독은 중요한 요소인가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하긴 어렵다. 고립과 고독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작업실과 작업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스스로 작업을 위해 만든 작업실은 당연히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은 아니므로 고립되고,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고독한 일이고, 고독한 시간은 작업시간, 창작을 위한 시간으로 환산될 가능성이 높다.

작업실과 작업시간으로 표현한 요소가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예술가들이 재능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했던 것과 겹치는 듯하다. 안정적인 소득이 있다면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을 창작활동에 쓸 수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창작지원금을 두고 논란이 있을 적마다 나오는 얘기다. 특히, 도심에 위치하지 않은 레지던시는 창작지원금이 중요해진다. 학교나 학원에서 부대수입을 얻거나, 작품을 거래할 기회가 적은 위치에 있을수록 체류기간 동안 안정적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 결국 창작의 기회를 넓혀주는 것과 같아진다.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은 충분히 입증이 된 것 같다. 전국의 도시와 시골을 아우르며, 공립과 사립을 오가며 많은 작업실 공간이 유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럼 이제 “연간 500파운드”의 안정적인 소득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필 때가 된 것 같다. 가끔 레지던시 관련 심의나 논의의 장에서는 ‘왜 방을 주는데 돈도 주느냐’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듣는다. 방을 주면 그 방에서 생존하며 창작하기 위한 돈도 줘야 한다는 지점은 아직 다수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게 확실하다. 대부분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운영 형태를 보면 그렇다.

가파도 레지던시에 입주했던 소설가는 레지던시 관리자여도 좋으니 더 체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장편소설을 한 편 탈고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고립된 섬에 제공된 방은 작가들에게 훌륭한 창작의 여건을 마련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설가는 이미 베스트셀러를 여럿 발행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한번 훌륭한 창작 여건에 필수요소는 “연간 500파운드”였음을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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