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넉넉잡아 백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어차피 망하는 마당에 악무한의 욕망을 지금처럼 마음껏 추구하며 야만의 삶을 악착같이 살다 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부터 다만 얼마간이라도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난 좀 더 품위 있고 절제된 진정한 문명의 삶을 살다 가야 할까.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2022년이다. 20세기 중반에 태어나 젊은 날의 대부분을 일천 구백 몇년으로 시작되는 해들을 살아온 탓인지 21세기가 시작되어 이천 몇년으로 시작되는 해들은 벌써 22년이나 흘렀건만 어쩐지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것처럼 여전히 낯설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들 탓에 어린 시절엔 21세기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기일 것이라 상상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살아남을까를 염려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벌써 2년 넘게 계속되고 있어 여전히 마스크 없이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매일 어딘가에서는 홍수가, 어딘가에서는 폭염과 산불이, 어딘가에서는 토네이도가 휩쓸고, 빙하가 녹아 마을을 덮치거나 지진과 화산 분화가 일어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음울한 상상력도 순진하고 소박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새해라고 한들 반가울 리가 있겠는가. 그저 더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 뿐인데 과연 그럴까.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신년의 시야는 속절없이 흐리기만 하다.
만일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넉넉잡아 백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어차피 망하는 마당에 악무한의 욕망을 지금처럼 마음껏 추구하며 야만의 삶을 악착같이 살다 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부터 다만 얼마간이라도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난 좀 더 품위 있고 절제된 진정한 문명의 삶을 살다 가야 할까. 인류의 존속이 진정 경각에 처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라면, 설사 역사의 시침을 되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최후의 얼마간이라도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무엇이 이런 위기와 재앙을 초래했는지 성찰해보고, 인간의 마음에 분명히 존재하는 모든 선한 의지를 한데 모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를, 이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해왔지만 누구도 정작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그 일을 시작하는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이 탐욕스러운 노인처럼 늙고 끔찍한 자본주의 체제와 정말로 안녕을 고하는 그 일을. 어떻게든 이익을 남겨야 하고 이익을 남기지 못하면 망한다는 간단한 명제 하나만으로 인간이 가진 능력을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최대한 끌어내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해낸 것이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을 남기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다 파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 많은 것을 한없이 만들어냈고, 그러한 무한대의 상품 생산은 인류에게 미증유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새로운 상품을 사서 사용하는 이 간단한 순환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인간은 기본적인 의식주에서 첨단의 문화생활까지 못 누리는 삶이 없어졌고, 해저부터 우주까지 못 가는 곳이 없어졌으며, 볼펜에서 비행기까지 못 사용하는 도구가 없어졌다. 그리고 더 많은 화폐를 소유할수록 이 모든 풍요는 더욱더 많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체제다.
하지만 이 풍요와 이익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의 대가가 따른다. 인간이 화폐의 노예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가는 것, 만인이 만인에 대해 야수가 되어 경쟁해야 하는 것, 노동이 고역이 되고 휴식이 죄악이 되는 것, 누군가는 가진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고, 누군가는 단돈 몇푼이 없어 죽는 것, 필요하지도 않은 너무나 많은 물건이 만들어지고, 또 너무나 많이 버려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성장의 영원한 물질적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지구라는 생태계 자체가 이제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다는 것, 화폐를 매개로 모든 것을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대한 공장은 앞에서는 이 모든 휘황한 풍요를 생산해내면서 뒤로는 이 모든 고통과 고갈 또한 생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일찍부터 이 괴물 같은 체제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해왔고 또 과감하게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이상주의자들의 허황한 몽상이나 패배자들의 상투적 불만이거나 새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불순분자들의 위험한 책략으로 간주되어 배척되었고, 그러한 실천들은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진정한 대안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인류사회는 이 체제를 끝내자는 생각보다 이 체제를 유지하자는 생각이 더 위험하며, 이 체제를 끝내거나 바꾸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인류 전체의 존속이 위태로워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해서 이윤을 창출하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산의 신화와, 생활이 더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소비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새로운 상품의 개발은 오직 지구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더 증대시키는 대체재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소비는 검소한 수준에서의 기본적 의식주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정도 내에서 절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산활동은 점차 자본과 시장의 영역에서 협동적 생활공동체의 영역으로 이전되고 자본의 활동은 오직 지구생태계의 지속과 복원을 위한 대체재 생산 영역이나 고도의 기술적 집적이 필요한 첨단 영역으로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산체제의 개편은 자연스럽게 노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산업의 자동화와 축소 개편으로 부족해지는 일자리는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과 생활공동체에서의 상호협동적 노동수요의 창출로 보완되며, 소득의 저하는 자본활동을 통해 창출된 사회적 이윤이나 자산과 소득에 대한 누진적 조세 등의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전면 확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 인류는 다가올 지구적 재앙을 모면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넘쳐나도록 풍요로워진 자본주의 생산의 성과들을 충분히 누리면서도 노동의 고통과 소외에서 벗어나 일과 휴식과 창조적인 여가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웬 뜬금없는 몽상이냐고 묻는다면, 어차피 모든 것이 답답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새해 벽두에 이런 행복한 몽상이라도 해야 좀 숨이라도 쉴 수 있지 않겠냐고 대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