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연합회와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 주최로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소상공인·자영업자 생존권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박현 | 논설위원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인 정책이 정부 재정 씀씀이다. 진보는 재정 확대를 통해 분배를 늘리자는 쪽인 반면, 보수는 사회안전망을 최소한으로 하고 가급적 시장 자율에 맡기자는 입장이다. 그런데 코로나19 국면에서 소상공인·자영업자에 대한 정부 지원 문제에서는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가 따로 없었다. 코로나 방역의 최대 피해자들이 이 엄혹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하자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자영업자들의 처지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다, 이들의 협조가 있어야 코로나 방역도 성공할 수 있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바로 재정 관료들이다.
소상공인 지원과 관련해 올해 관료들이 보인 태도 중 납득하기 어려운 사례 2가지만 들어보겠다. 하나는 5월25일 국회에서 열린 손실보상법 입법청문회. 정부는 소상공인에게 이미 지급된 재난지원금이 6조1천억원으로 손실 추정 액수인 3조3천억원보다 많다고 잠정 추산한 자료를 제시했다. 최상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은 이를 근거로 “소급하게 되면 정산이 필요하고, 정산을 하면 (지원금을) 환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손실액을 어떻게 계산했는지 모르겠으나 정부가 환수해야 할 정도로 지원을 했다는 데 동의할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지난 10월8일 공개된 손실보상법에 따른 보상 산식이다. 주요 선진국은 피해 보상을 할 때 코로나 이전 대비 매출 감소액을 기준으로 일정 비율을 지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상 산식엔 ‘꼼수’가 숨어 있다. 매출 감소액에다가 ‘매출 대비 고정비 비중+영업이익률’을 곱하는 방식으로 손실액을 산정한다. 이것마저도 다시 ‘보정률’(피해 인정률) 개념을 도입해 80%만 인정해준다. 보상 대상 업체 중 14.5%의 분기별 보상액이 10만원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나온 것도 이런 괴상한 산식 때문이다. 그나마 나중에 국회가 문제를 제기해 이를 50만원으로 올렸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코로나 발생 이후 2년이 다 되도록 피해 보상 수준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건 근본적으로 정부가 소상공인들이 입은 피해를 온전히 인정해주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서울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해도 매달 인건비·임대료 등 고정비가 500만~1천만원 나가는데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재난지원금 몇백만원을 줘도 한달 고정비 보전도 안 된다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인건비는 직원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지만 임대료는 그럴 수도 없다. 소상공인들의 빚이 폭증한 이유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자영업자 257만여명의 대출 잔액이 887조5천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1분기 700조원에서 무려 187조5천억원이나 불어난 것이다. 이 대출금이 모두 사업운영자금으로 쓰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 가운데 절반만 사용됐다고 해도 그 액수가 90조원이 넘는다. 국책연구원의 한 경제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소상공인 대출 중 상당액이 임대료로 상가 주인에게 간 거다. 정부의 행정명령으로 장사를 못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이건 국가가 아니다.”
여론이 비등해도 관료들은 흔들림이 없는 것 같다. 기재부는 최근 발표한 ‘내년 경제정책방향’에서 기존 정책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현 손실보상 방식을 유지하고, 긴급한 자금 애로 해소를 위해 35조8천억원 규모의 저리 자금 공급을 지속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은 소상공인들에게 빚을 더 내 버티게 하겠다는 얘기다.
지난해 코로나 발생 초기에 정부는 미국의 코로나 대책을 베끼듯이 하며 대거 도입했다. 기간산업안정기금 40조원 조성을 비롯해 기업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대책들이 포함됐다. 그런데 미국이 소상공인·중소기업을 위해 도입한 ‘급여보호 프로그램’(PPP)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정부가 소상공인·중소기업에 저리 대출을 제공하고, 해당 업체가 고용을 유지하면서 대출금을 인건비와 임대료 등 필요경비에 사용하면 대출금 상환을 그만큼 감면해주는 제도다. 형식은 대출이지만 고용 유지를 하면 사실상 현금 지원을 해주는 셈이다. 다만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이 제도는 고용 유지와 고정비 지원, 자금 용도 전용 방지까지 1석3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마침 여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한국형 급여보호 프로그램’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제라도 관료들이 이 제도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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