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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말엔 주로 누워 지냅니다

등록 2021-12-23 15:41수정 2021-12-25 15:52

걷는 동안, 걷는 걸 상상하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고, 또 한해가 저문다. 하늘공원. 사진 배정한
걷는 동안, 걷는 걸 상상하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고, 또 한해가 저문다. 하늘공원. 사진 배정한

[크리틱]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다들 주말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하다. 내가 속한 한 대화방의 테마는 야구인데, 경기 승패와 기록, 선수 신상과 연봉 외에 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주말 아침이면 금기의 빗장을 여는 포스팅이 뜨곤 한다. 한 친구는 신새벽부터 인왕산에 올라 서울의 파노라마 뷰를 선물한다. 어느 친구는 어느새 서해안 어딘가에 도착해 절경을 포착한다. 늦둥이 육아의 즐거움과 고됨이 교차하는 사진을 올리는 친구도 있다.

다들 참 부지런히, 다양한 방법으로 주말을 보낸다. 나는 ‘우오오’ 유의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지만 와식 생활에 대한 강한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내 경우엔 공유할 인증샷이 없다. 신생아처럼 평화롭게 온종일 침대와 하나 된 중년 사내의 모습을 인증할 수는 없잖은가. 일주일 내내 책을 너무 많이 봤어. 열강을 서슴지 않았고 머리도 너무 많이 썼어. 나의 궁색한 변명이 공감을 얻는 경우, 거의 없다.

그런데 어느 주말 저녁, 무심히 튼 예능 프로그램 재방에 김영하 작가가 홀연히 등장해 나를 구원해주었다. “사람은 자기 능력의 100%를 사용해선 안 된다. 70%만 써야 한다. 최선을 다하면 큰일 난다. 인생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능력과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나는 집에서 대체로 누워 지낸다. 함부로 앉아 있지 않는다”는 게 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 주말 와식 생활은 일상의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영혼의 지방층을 두텁게 하는 지혜의 산물이지!

침대가 질리면 물속에 들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주말의 유일한 변주, 반신욕이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묵은 물때가 도통 지워지지 않는 낡은 플라스틱 욕조에 뜨거운 물 가득 받아 몸을 맡긴다. 입욕제나 오일, 넣지 않는다. 장미꽃잎, 띄우지 않는다. 애정하는 줌파 라히리의 책 <내가 있는 곳>을 목욕물에 빠뜨리고 난 뒤 서둘러 욕조 덮개를 사기는 했다. 자주 들어 이물감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랜덤으로 재생하고 대형 맥주잔에 채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시원한 편백 향기 나는 욕조 덮개 위에 안전하게 모신 책을 읽는 한두시간. 행복이 손에 잡힌다.

와식 충전의 부작용으로 뻐근한 허리를 뜨거운 물로 다스리며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요즘은 걷기에 관한 책들에 취미를 붙이게 됐다. 철학자나 문인의 걷기 습관과 산책 일화를 다루는 책, 제법 진지하게 걷기와 세계의 대화를 시도하는 책, 걷기를 통해 도시의 재발견과 장소의 재구성을 꾀하는 책. 물 안에 비스듬히 누워 상상력으로 책 속의 거리를 걷는다. 어느 날은 익숙한 도시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고, 또 어떤 날은 낯선 도시를 정처 없이 떠돌다 일몰의 향연과 마주친다.

걷는 걸 즐기지만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건 걷는 게 아니라 걷는 걸 상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라는 허세 가득한 문장을 첫 줄에 적어놓은 이번 학기 ‘환경미학’ 강의계획서를 보고 한 수강생이 내게 물었다. 평소에 자주 걸으세요? 자주 걸으려고 노력해요.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모든 게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잖아요. 몸을 일으키기만 하면 우리는 움직이게 되죠. 그럼, 주말에 많이 걸으시겠네요? 아니, 함부로 걷지 않고 주로 누워 지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말은 지속가능한 삶에 필요한 힘을 충전해주죠.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권합니다.

누군가는 산에 오르고 누군가는 바다를 품에 안고 또 누군가는 멍하게 누워 충전의 시간을 반복하는 동안 계절은 또 바뀌었다. 걷는 동안, 아니 걷는 걸 상상하는 동안 가을은 겨울이 되었고 도시의 밤이 길어졌다. 이렇게 또 한해를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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