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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뭣이 중헌디

등록 2021-12-16 19:00수정 2021-12-17 02:32

엔번방 방지법의 시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국외 사업자가 운영하는 메신저 서비스가 사각지대로 남겨졌으니 여기서 벌어지는 디지털 성범죄물 유포를 막을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이용자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논의가 개정 전기통신사업법의 시행 자체를 반대하거나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김민정 |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해시(hash)라는 게 있다. 긴 데이터에 해시 함수라는 수학적 연산을 적용해서 나온 결과 값인데,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가령, D8A4754EF32B1Z 이런 식이다. 그 파일만이 갖는 고유의 값이고, 그래서 디지털 지문이라 불린다. 사람이 봐서는 의미를 알 수 없고, 원본 파일의 내용을 유추할 수도 없다. 그저 지문처럼 일치 여부만 따질 수 있다.

같은 파일은 같은 해시를 갖는다. 해시를 대조하면 쉽고 빠르게 복제물을 찾아낼 수 있다. 저작권 침해를 막기 위한 기술적 보호 조치, 즉 필터링에 사용된다. 유튜브는 2007년부터 이 기술로 불법복제물을 찾아내 자동 삭제한다. 페이스북도 2017년부터 해시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동의 없이 유포되는 성적 이미지’(Non-Consensual Intimate Images·NCII)를 사전 차단한다. 그렇다. ‘사전’ 차단이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에 적극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협력해 시범으로 시작했고 2018년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로 확대했다.

작동 방식은 이렇다. 피해자들이 제출한 엔시아이아이(NCII)에 해시 기술을 적용한다. 디지털 지문을 만든 뒤 이미지 자체는 파기한다. 해시들을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다. 누군가가 이미지를 게시하거나 메신저로 공유하려고 하면 해당 이미지의 해시를 추출해 엔시아이아이 해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한다. 해시가 일치하는 경우 전송이 불가능하도록 조치하고, 그 이용자에게 이용약관 위반이라고 알린다. 이런 사전 차단 조치는 피해자의 사생활, 성적 자기결정권, 존엄성을 보호한다는 이점이 크고 명백하다. 아무리 신고하고 삭제해도 끊임없이 유포되는 게 성범죄 촬영물이라는 걸 고려하면 적극적 필터링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 기술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해시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건 ‘엔(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 등 개정안) 때문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자에게 불법촬영물을 사전에 필터링하도록 했다. 방식은 페이스북과 비슷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관리 중인 불법촬영물 해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걸러낸다.

엔번방 방지법이 시행과 동시에 ‘통신 비밀을 침해한다’, ‘검열을 일상화한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과연 그런가. 페이스북은 자사의 메신저 서비스, 즉 사적 대화에도 이 기술을 적용하지만, 이 법에 따른 필터링 의무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유통되는 정보”에만 적용된다. 애초에 통신의 비밀이 보호되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 한정되는 만큼 통신 비밀 침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검열이라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다.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은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것을 말하므로 검열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적절하지 않다. ‘사적 검열’이라는 차원에서 넓게 본다고 해도 일반에게 공개되어 유통되는 표현물에 대해 사전 심사를 거치도록 하는 제도는 이미 다수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제,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등급분류가 대표적이다. 이 모든 심사가 검열적 요소를 가지니 전면 폐지해야 할까.

엔번방 방지법의 시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국외 사업자가 운영하는 메신저 서비스가 사각지대로 남겨졌으니 여기서 벌어지는 디지털 성범죄물 유포를 막을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이용자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개발한 소프트웨어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서비스 안정성 확보 의무가 사업자에게 과도한 부담은 아닌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논의가 개정 전기통신사업법의 시행 자체를 반대하거나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저작권 보호를 위한 필터링은 공정이용 가능성을 차단하지만 오랜 기간 이뤄져왔다. 민간에 의한 표현물 등급제는 자의적이고 모호한 판단 기준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 메신저 서비스에서도 엔시아이아이를 사전 차단하는 페이스북의 결정은 피해자의 성적 프라이버시 보호와 통신 비밀의 보호라는 두가지 가치 중 전자가 더 보호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은 무엇을 보호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절실한가의 문제다. 얼마 전만 해도 ‘가족의 사적 영역’이라며 가정폭력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과도한 우려를 접하니 영화 대사가 생각난다.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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