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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계속 사랑해보겠습니다

등록 2021-12-16 15:27수정 2021-12-17 02:31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2월이 되면 거리는 검은색 외투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몇년 전 무릎까지 오는 검정 패딩점퍼의 폭발적 유행으로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승객 전원이 조기축구회 회원처럼 보였었는데, 그 여파가 지속되는 모양이다. 집에서 입던 차림새 그대로에 검정 패딩을 겉에 푹 뒤집어쓰고 지퍼만 목까지 올리면 당장 외출이 가능해진다. 머리엔 까만 비니를 쓰고 얼굴엔 흰색 방역 마스크를 쓰면 칼바람도 두렵지 않은 완전무장이 된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좋을 때도 있다.

흑백은 세련된 절제미의 정수이지만, 감각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색은 아니다. 과거에는 화가처럼 전문인만 염료를 구해 색을 쓸 수가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합성염료가 발명되면서 새로운 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색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할 일이 잦아진 19세기 후반에 영어에서 색으로 가득하다는 뜻을 가진 ‘컬러풀’(colorful)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그 무렵의 유럽은 예술이 풍성하고 창조적 에너지가 넘쳐났다. 다채롭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똑같은 검정 패딩 속에 몸을 감춘 탓인지,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탓인지,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연말이다. 연인과 함께 달콤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싶다면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던 독신들의 애인급구 타령도 들리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면, 사랑은 귀찮아서 아예 시작조차 거부한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시들어버린 꽃처럼 시큰둥하게 연애인지 아닌지 모를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대답들을 한다.

감각적인 모든 행위가 코로나 전염의 위험과 맞닿아 있으니, 연인이라 해도 주변의 눈치가 보일 것이다. 데이트할 때 극장에 가서 손을 잡고 얼굴을 맞대지도 못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기도 어렵다. 맘껏 애정표현을 할 수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사랑이 최대의 위기를 맞은 때임에 틀림없다. 연인들이 즐겁지 않은 무채색의 겨울은 쓸쓸해 보인다. 얼어붙은 침묵의 도시 같다고 할까.

무감각해진 연인의 사랑을 그린 공상과학 영화 <퍼펙트 센스>(2011)가 생각난다.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전세계로 퍼지는 열악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사랑을 계속해보려 한다.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오감 중 하나씩 감각을 잃어간다. 첫 단계로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게 슬퍼지며 눈물을 쏟더니 곧 후각을 잃게 되었다. 다음 진행 단계는 미각의 상실이 일어났는데, 한바탕 불안에 떨며 광란의 식탐을 보이더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귀가 멀게 되는 것은 그다음이었고 극도의 분노와 폭력성을 사전에 동반했다.

이쯤 되니 질병으로 인한 증상인 줄 알면서도 남녀 주인공은 더 이상 연인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아직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은 각자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어떻게든 남아 있는 불완전한 감각에 적응해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생존만을 위해 살던 남녀는 불현듯 사랑을 기억해내고, 자신이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리로 뛰쳐나가 서로를 발견하고 포옹하는 두 사람. 그리고 마침내 둘은 시각마저 잃었다.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된 두 주인공이 ‘그래도 우리 계속 사랑해보겠습니다’라고 외치듯 상대를 의지하며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은 뭉클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도 불안, 분노, 슬픔, 좌절, 무기력감을 한 단계씩 겪어야 했고,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감정들에 밀려 사랑은 포기하듯 제쳐두어야 했다. 한해의 끝자락을 넘기며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역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의지가 간절한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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