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의 기억 아프리카 르완다 _06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의 죽음만을 강조하던 투치족 출신 폴 카가메 대통령 정부가 볼 때 그는 눈엣가시였고, 그의 노랫말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노래 공개 뒤 경찰의 반복된 소환조사와 정부 정보기관의 협박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2020년 2월17일 그가 별안간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아프리카 르완다에는 키지토 미히고(작은 사진)라는 유명한 민중 가수가 있었는데, 지난해 갑자기 죽었다. 그는 1994년 르완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대량학살 때 12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할머니 등을 잃고 겨우 살아난 생존자이기도 하다. 신학교에 다니던 그는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으나, 유럽에서 클래식 음악가로 사는 대신 모국어인 키냐르완다어로 노래하기 위해 2011년 르완다로 돌아왔다. 정부의 환영을 받았고 종종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공식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던 그의 운명은 2014년 3월 ‘죽음의 의미’라는 노래를 유튜브로 발표한 뒤 바뀌었다. 후투족에 살해당한 투치족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투치족의 복수로 보복 살해된 후투족에 대한 애도를 의미하는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노랫말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서로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부족인 투치족(르완다 애국전선)이 국가를 장악하면서 자행된 후투족에 대한 보복 살인을 반대하며, 부족 간의 용서와 화해·평화·공존을 줄기차게 호소해왔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의 죽음만을 강조하던 투치족 출신 폴 카가메 대통령 정부가 볼 때 그는 눈엣가시였고, 그의 노랫말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노래 공개 뒤 경찰의 반복된 소환조사와 정부 정보기관의 협박을 받아왔다. 급기야 내가 다녀온 2014년 4월7일 열린 대량학살 희생자 20주기 추모식 공연 무대에 그는 서지 못했다. 추모식 4일 전 경찰에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키지토 미히고를 내란 선동 및 대통령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고, 그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그의 노래는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영국의 <비비시>(BBC)는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보고서를 인용해 ‘(그가) 경찰에 의해 국가 전복 테러 모의와 관련해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보도했다. 2018년 대통령 사면을 받고 출소했으나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으며 국외여행이 금지되었다. 그는 출소 뒤 휴먼라이츠워치와의 인터뷰에서 “당국으로부터 정치적 양심에 반한 협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간지 <메일 앤 가디언>도 “미히고에 대한 르완다 정부의 탄압은 투치족만 죽었다는 카가메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던 중 2020년 2월17일 그가 별안간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르완다수사국(RIB)은 ‘부룬디에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된 그가 4일 뒤 수도 키갈리의 레메라 경찰서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르완다 정부는 키지토 미히고의 부검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많은 인권단체와 외국에 기반을 둔 르완다 활동가들은 애도에 앞서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의 소리>(VOA)는 그의 친구들의 말을 인용해 ‘미히고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자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보도했다. 나는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들을 검색해보았다. 수많은 댓글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고, 국가 공권력이 그를 죽였다는 글들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키지토 미히고와 관련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지난 10월12일 주한르완다대사관을 사전에 약속하고 찾아갔다. 그런데 대사관의 대외협력 담당 직원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리에서 일어나 윗사람(대사)과 한참 이야기를 한 뒤 돌아와 “키지토 미히고와 관련해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혹시 그의 죽음이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여서입니까?”라고 물으니 그 직원은 머리를 끄덕였다. 질문을 더 이어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출퇴근길에 10분31초 길이의 그의 노래 ‘죽음의 의미’를 여러번 반복해서 들었다. 가스펠처럼 차분하게, 하지만 절규하듯 간절하게 화합과 용서를 울부짖던 그의 노래는 르완다 언어로 불리고 있었지만 충분히 가슴에 와닿았다. 르완다에서는 반정부 인사에 대한 탄압과 실종·사망 및 망명 사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학살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르완다 민중 가수 키지토 미히고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르완다 수도 키갈리 대량학살 기념관에는 희생자 25만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뒤늦게 확인된 희생자도 여기에 이름을 올린다. 키갈리/김봉규 선임기자
키지토 미히고.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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