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사회비평가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 태양계의 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절정에 달했다. 19세기를 사는 문명인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걸 모른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는 지식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셜록 홈스 전집, <주홍색 연구>)
미취학 어린이일 적 내가 가장 동경했던 외국 사람 셜록 홈스는, 수십년이 지나 읽으니 그때와 다른 차원에서 흥미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지금 보니 그가 참으로 21세기적인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는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셜록 홈스들을 만날 수 있다. 베이커 거리 221B에 살던 이 괴짜 사내처럼,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한 타임라인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가 욕망하는 정보 외에는 무가치하다 여기거나 무관심하다. 단어를 둘러싼 최근의 소동들을 떠올려 보자. “명징하게 직조된? 대체 왜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이 어려운 말을 쓰는 거죠?” “사흘이라고 하면 ‘사’가 들어가니 당연히 4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금일이라 하면 금요일인 줄 알지 누가 그걸 오늘로 알아요?” “‘무운을 빈다’, 즉 ‘운이 없기를 빈다’라는 뜻이죠.”
이런 얘길 꺼내면 기성세대, 특히 연배 지긋한 어르신들은 반색하며 맞장구친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것들의 몰상식과 무식함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물론 저런 단어를 모르는 건 무식한 게 맞다. 그럼에도 난 어르신의 성토대회에 온전히 동참할 수 없다. 단순히 특정 세대의 무지가 드러난 사건이라기보다 우리 시대의 어떤 ‘곤경’을 보여주는 징후라 여기기 때문이다.
단어나 개념의 의미를 공유하는 일은 그저 개인의 학습 수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말글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품은 세계관, 가치기준, 정서 등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것이다. 명징·직조·사흘·금일·무운 사태에서 정작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은 젊은 세대의 무지 자체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태도다. 그들은 저 단어를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기보다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느냐’는 듯 당당했다. 이게 핵심이다. 모르는 것이 수치스러우려면 그것이 중요한 지식이라는 합의 내지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공통 감각이 없거나 옅다면, 무지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되고, 더 나아가면 “난 그걸 알기 싫다”는 ‘적극적 무지’에 가닿게 된다.
이는 젊은 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얼마 전 참석한 어느 토론회에서 나는 젊은 세대와는 또 다른 기성세대만의 ‘무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토론회는 선배 세대 언론인과 후배 세대 언론인들의 인식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리였는데, 어떤 선배 기자는 후배들이 선호하는 기후위기나 젠더 이슈에 대해 “그런 말랑말랑한 아이템은 교양국에 주고 우리는 묵직하게 가야 한다”고 사자후를 토했다. 또 다른 선배 세대 기자는 입사지원자 중 하나가 6·10 항쟁과 6·15 선언을 혼동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요컨대 6·10 항쟁과 6·15 선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속하기에 결코 혼동해선 안 되지만, 기후위기나 젠더 의제는 여의도 정치나 검찰개혁보다 가벼운 사안인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이 ‘명징·직조’와 ‘무운’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그들은 기후위기와 젠더 문제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고 태연자약 말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판단, 뉴스의 우선순위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없어 보였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지나친 자기 확신이다. 그런 태도는 확장해야 할 논의를 각자의 폐쇄회로에 가둔다. 세상 대부분의 사건, 특히 가치관과 관련한 것은 자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한때 그토록 단단해 보였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척 헐거워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금 젊은 세대는 학생회나 노동조합 지도부, 즉 위임되거나 대의된 권력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사안마다 ‘전원 다수결’로 결정하자고 주장한다. 소위 단톡방 문화에 익숙한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기성세대와 사뭇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공론장의 토론은 점점 더 난감해지고 있다. 이 셜록 홈스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