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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차라리 원숭이가 고발장을 썼다고 하자

등록 2021-12-01 18:02수정 2021-12-02 11:32

김남일 | 사회부장

무한 원숭이 정리가 있다. 무수히 많은 원숭이가 무한히 많은 타자기를 무한의 시간 동안 마구 두드리다 보면 원숭이 중 한마리는 우연히 세상의 모든 책을 타이핑하는 때가 온다. 이 사고실험에 따르면 무한의 시공간 속 원숭이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보르헤스 소설을, 퓰리처상 수상 기사를, 지금 이 칼럼을 결국에는 쓸 수 있다. 보르헤스는 6마리 원숭이(실은 한마리면 충분하다고 했다)가 영원히 타자기를 치면 영국국립도서관 장서를 모두 써낼 수 있다는 알레고리를 전한다.

사고실험은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다. 구글링을 하면 무한 원숭이 시뮬레이터가 검색된다. 무작위로 선택된 알파벳을 끊임없이 쳐 넣도록 코딩된 시뮬레이터에 고발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accuse’를 적용해봤다. a-c-c-u-s-e 배열이 우연히 완성될 이론적 확률은 308915776분의 1이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미국에서 간혹 터지는 거액의 복권 당첨 확률이 대략 이 정도다. 단어 하나가 이러하니 제대로 된 문장이 우연히 완성되려면 거의(무의미한 표현이다)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다. ksyszbklnefxmxwewaomgzvpfxeyb…. 난수처럼 찍히는 알파벳을 한참 지켜보다 포기했다.

사고실험은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2003년 영국의 한 대학에서 원숭이 6마리에게 컴퓨터 한대를 주고 실험했다. 한달 뒤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원숭이들은 5페이지에 걸쳐 주로 에스(S)를 두들겨댔고 키보드에 대소변을 봤다. 햄릿의 독백이 완성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배변 훈련을 시키는 게 더 빠를 일이다. 무한 원숭이 정리는 결국 가능성의 확률보다는 불가능의 불가능의 불가능을 말하기 위한 비유로 수렴한다.

고발장을 생각한다. 대검찰청 검사와 수사관 그 누구도 타이핑하지 않았다는 고발장 두건은 각각 20페이지, 8페이지 분량이다. 공직선거법 전문가는 돼야 적용할 수 있다는 방송·신문 등 부정이용죄 조항이 적혔다. 8페이지짜리 고발장은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대검찰청에 접수한 고발장과 내용과 표현이 동일하다. 국민의힘도 누구한테 받았는지 모른단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최소 무한 원숭이 3마리가 동시에 고발장을 완성할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아득하고 아득하고 아득하다. 우주 탄생도 이보다 신비롭지 않을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고발 사주 수사가 석달 가까이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손준성 검사와 김웅 의원이 내놓은 해명을 모아보면 고발장 창조론을 간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손준성 보냄’으로 고발장이 전달됐고, 그 고발장 초안을 “저희가 만들어 보내드리겠다”는 육성 파일이 공개됐는데도 나는 전달하지도 만들지도 않았다는 주장만 무한 반복한다.

마침 창조론 진영에도 무한 원숭이 정리와 유사한 주장이 있다. 비행기 부품이 쌓여 있는 야적장을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더니 보잉747이 뚝딱 조립됐다는 ‘정크야드 토네이도’ 비유다. 진화론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확률에 근거하고 있다고 공격하려는 의도다. 길고 긴 진화의 중간과정 없이 바로 복잡한 고등생물(보잉747)이 나타나는 억지 비유여서 오히려 창조론의 빈약함만 드러낸다.

고발장에는 고발 사주로 진화하는 중간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시기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내려받거나 모니터링한 판결문, 유튜브 등이 고발장에도 담겼다. “피고발인은 윤석열 검찰총장과 그 가족, 측근을 비방하여 4·15 총선에서 범여권의 선거 승리를 유도하고자 ‘윤석열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가 불법적인 주가조작을 하여 재산을 축적한 의혹이 있다’ 등 불특정 다수인들을 상대로 보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피고발인들은 공모하여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피해자 윤석열, 김건희, 한동훈 등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현직 검찰총장과 그 가족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고발장 작성과 전달 의혹에 대검찰청 전·현직 간부 이름과 육성이 등장한다. 공수처가 손준성 검사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고발 사주로 진화하는 잃어버린 고리를 채우지 못하면 원숭이를 찾는 수밖에 없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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