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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심채경의 랑데부] 오래 보아야 친근해진다, 과학도 그렇다

등록 2021-11-25 18:19수정 2021-11-26 02:32

몇달이 지나지 않아 내 차례도 왔다. 내가 편집한 과학 학술기사를 보고 ‘Ge’가 대체 뭐냐고 물어 온 것이다. 나는 크게 외쳤다. “게르마늄인데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가 전에 그랬듯이 동료 역시 짧은 탄식만을 남기고 입을 닫았다. 대학원 신문의 학술 지면이었으니 쉬운 단어로 바꾸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채경 | 천문학자

원호섭 기자의 <과학, 그거 어디에 써먹나요?>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과학 기사를 주로 쓰다 보니, ‘어려운 용어를 쓰지 마라’, ‘기사를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 쓰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도 그러기에 한번은 중학교 3학년 교과서를 사 와서 봤더니, 쉬운 말로 바꾸라고 지적받은 용어들이 전부 교과서에 실려 있더라나.

총부채상환비율을 모르면 무식하지만, 엔트로피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분위기. 그것은 비단 일반 대중을 위한 매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대학원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한때 교내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처음 들어가자마자 ‘이세고리아’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인문계열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면박을 받았다. 신문 지면 중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코너의 이름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어로 누구나 평등하게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뜻한다고 했다. 평소 상대방의 발언권을 존중하면 되지 그걸 지칭하는 단어를 꼭 알아야 하나 싶어 반발감이 들었지만,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의 발언권을 존중하는 단어를 놓고 설왕설래할 수는 없었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 내 차례도 왔다. 내가 편집한 과학 학술기사를 보고 ‘Ge’가 대체 뭐냐고 물어 온 것이다. 나는 크게 외쳤다. “게르마늄인데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가 전에 그랬듯이 동료 역시 짧은 탄식만을 남기고 입을 닫았다. 대학원 신문의 학술 지면이었으니 쉬운 단어로 바꾸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원소기호는 더 이상 풀어 쓸 수도 없다.

과학적 용어가 나오면 무조건 ‘쉽게 설명하라'는 요구가 따라오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과학적 개념이나 용어를 잘 설명하는 콘텐츠가 더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낯선 단어를 수용하는 독자들도 더 필요하다. 딥러닝이나 비트코인 같은 개념도 처음에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원리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계속 읽고 접하다 보니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별다른 해설이 따라붙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지난주, 달 표면에 고에너지 입자 검출기를 보낸다는 발표가 있었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내년부터 매년 두세 대 정도의 착륙선을 달에 보낼 계획이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관측기기도 하나 싣기로 한 것이다. 현재 계획된 일정대로라면 오는 2024년 무렵에는 달 앞면 서쪽 한켠에서 보내오는 관측 결과를 받아볼 수 있게 된다.

이 기기에 관해 언론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단어가 너무 어렵다는 평이 돌아왔다. 관측 대상인 전자·양성자를, 그리고 이들을 총칭하는 입자라는 단어를 더 쉬운 말로 바꿀 수는 없는지 물어 와서 망연자실했다. 개념이 낯설다고 해서 용어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우주에 참 많다. 우주는 텅 비었다고들 표현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많은 물질이 존재한다. 지구와 달 사이에도 아주 작은 우주먼지나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전자, 양성자 등 지상에 있는 인간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물질들이 있다. 이들의 개별 단위를 일컬어 흔히 ‘입자’라고 한다. 과학적으로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대명사다. 전자도 입자라고 부르고, 달 표면 겉흙의 알갱이 하나도 입자라고 부른다. 그러니 우주에 있는 입자들은 아주 다양하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어떻게 가는 중이며, 그 여정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다.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 이런 작은 입자들을 관측하는 기기를 만든다. 대상이 되는 입자의 특성, 관측할 수 있는 위치, 주변 매질의 환경 등 변수가 많으므로 다양한 관측기기가 필요하다. 하나의 기기로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극히 일부의 현상만을 알 수 있다. 눈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 다만 코끼리를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고, 여러 도구를 활용해 다양하게 접근하면서 우주라는 자연의 퍼즐을 하나둘씩 맞춰보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종류의 입자를 다른 방식으로 관측하는 기기를 우주로 쏘아 올릴 것이다. 매번 쉬운 말로 대치해버린다면, 앞으로 제작할 다양한 기기를 모두 입자 검출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과학은 원래 쉽지 않다. 전자와 양성자와 플라스마 같은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쓰이기를 바란다. 뭐든 자주 보아야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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