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사망 다음날인 24일, 9개 조간신문 사설을 봤다. 제목에서 전두환에 대한 명칭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세계일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국민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는 ‘전두환’으로, 그리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학살자 전두환’으로 각각 표기했다. 이날 외신 기사에선 <뉴욕타임스>가 ‘전 군부독재자’(Ex-Military Dictator)로, 프랑스 통신사인 <아에프페>(AFP)는 ‘학살자’(Butcher of Gwangju)로 표기했다.
23일 오전 10시30분 논설위원실 회의에서 제목에 ‘학살자’를 넣을 것인지 ‘잠깐’ 논의했다. 이견이 없었다. 사설 제목은 ‘한 마디 사죄도 없이 떠난 ‘국민 학살자’ 전두환’이었고, <인터넷 한겨레> 오전 10시54분 기사 제목은 ‘학살자 전두환, 반성없이 죽다’였다. 그때까지 논설위원실과 편집국이 ‘학살자’ 제목에 대해 같이 논의하진 않았지만, 그의 죄상과 역사적 규정을 보다 분명히 하고픈 마음은 같았나보다. 2021년 세상에서, ‘학살자 전두환’이라 쓰는 데에 용기가 필요하진 않다.
전두환 시절로 돌아가 1986년 7월16일, 문화공보부가 각 언론사에 배포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다음날) 보도지침을 보자. <17일자> ①금일 하오 4시 검찰이 발표한 동사건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②사회면서 취급할 것(크기 재량에) ③검찰발표 전문, 꼭 실어줄 것 ④(보도)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⑤동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⑥발표외 신문사 독자적 취재보도 불가 ⑦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NCC(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단체 등의 동사건 관계 표명” 일절 보도불가.
실제 다음날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 “「성적 모욕」 없고 폭언·폭행만 했다”, <동아일보>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경향신문> “성적 모욕행위 없었다” 등으로 보도지침을 충실히 지켰다. 다만, 그 기사는 모두 사회면 톱이었고, ‘성적 모욕’이라는 말은 모두 따옴표로 표기했다. <동아일보>는 ‘검찰 발표’라는 점을 제목을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혔다. 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문귀동 경감의 사진을 신문에 박았다. <동아일보> 사진이 더 컸다. 제목만 보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35년 전 전두환 시절 기사인데, ‘행간을 읽어주길 바라는’ 그때 기자들의 자괴감 속 마음이 읽히니, 기자 생활을 너무 오래한 것일까.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 기자들은 공동사표를 제출하면서 이런 성명을 냈다. “우리는 보았다/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고.
자료 : 박화강 전 <한겨레신문> 기자(1980년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앞서 5월16일, 기자협회는 ‘검열거부 선언’을 발표했다. 검열거부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합동통신 등 전 언론사로 번졌다. 광주 상황을 전혀 보도하지 못하고, 계엄 당국이 발표한 허위 사실을 보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당국에 끌려간 송건호(1927~2001)는 각목으로 온몸을 구타당하는 모진 고문으로 말년에 깊은 병을 얻었다. 그해 1200여명의 기자들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했다.
전두환의 죽음 앞에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1980년 5월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나는 ‘학살자’ 제목을 달자 할까. 1986년 7월로 돌아간다면, 그때 나는 “성적 모욕 없었다”가 아니라, ‘성고문 있었다’라고 쓰자 할까. 그도 아니면, “부끄러워 붓을 놓”았을까.
전두환 정권이 저물어가던 1987년 8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연례 총회 자리에 해직기자 정태기와 권근술이 찾아갔다. “새신문을 만들려 한다”며 지원을 부탁했다. ‘대통령 선거’라는 거대한 싸움 앞에 ’신문’은 뒷전이어서 대부분 시큰둥했다. 그런데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좋습니다. 합시다. 대신 우리하고 같이 합시다. 당신들 언론인, 지식인끼리만 일을 벌이면 자기 감정에 함몰됩니다. 민중과 함께 합시다”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창간 준비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주변을 얼쩡거리던 정보요원들이 ’운동권이 지원하면 무조건 입사시키는 겁니까’라고 묻자, 정태기는 “그런 기준으로 뽑아 제대로 된 신문을 만들 수 있겠소? 다만, 이런 원칙은 세웠어요. 기자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만 뽑는다. 기자를 정치권력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못 들어온다”라고 답했다.
1987년, 문익환(1918~1994)이 그리는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과 정태기(1941~2020)가 그리는 ‘제대로 된 신문’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2021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신문’을 만들면, 결과적으로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이 되리라 본다. 그러나 선후가 뒤바뀌면 모든 게 일그러질 수 있다.
24일치 대부분 신문들이 1면 사진으로 전두환의 계엄사령관 때 또는 최근 사진을 게재했다. <한겨레신문>은 전두환 대신, 1980년 5월 당시 망월동 묘역에서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오열 장면을 담았다. 이때 ‘제대로 된 신문’과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이 다르지 않다 본다.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 광주항쟁 한복판으로 들어가버린 시민군 태수(최민수)에게,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후배 칠수의 어머니(김을동)가 전남도청을 떠날 것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반장님은 살아있어야지. 살아서 늠들한테 우리 얘기를 해줘야지. 우리 말 안 믿을지 모릉께, 반장님 같은 타지 사람이 우리 얘기를 해줘야 써. 그것이, 그것이 나의 부탁이고 우리 칠수의 부탁이여. 거절하지는 않것지?” 결국 승락한 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내 괴로울 겁니다.”
기자는 늘 ‘타지 사람’이고, 이어야 한다. 그래서 ‘남의 얘기’를 써야 한다. 그렇지만 ‘괴로워야 한다’. 나는 지금 충분히 괴로운가. 무엇에. 전두환에 ‘학살자’ 칭호를 붙이는 게 너무 쉬워진 날.
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