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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개와 로봇과 인간의 대통령

등록 2021-11-18 18:34수정 2021-11-19 10:17

한 후보는 로봇을 함부로 대했다고 비난을 받고, 다른 후보는 개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를 지켜보는 정치인들은 앞으로 개와 로봇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와 로봇에 대한 태도를 놓고 티격태격하던 정치인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모처럼 의견 일치를 보았다. 올해 11월10일이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민동의 청원 심사기한을 2024년 5월29일로 미루자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맨앞)가 28일 오전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로보월드’에서 사족보행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고양/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맨앞)가 28일 오전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로보월드’에서 사족보행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고양/공동취재사진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이번 학기에 대학원에서 ‘인공지능과 로봇 정책’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하고 있다. 자율주행차, 돌봄 로봇, 인공지능과 인종, 로봇과 젠더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과제로 내주는 책과 논문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로봇에 대한 연구들이고, 일본에 대한 연구가 조금 있고, 한국 것은 그보다 적다. 그래서 지난 10월28일 ‘로보월드’ 전시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4족 보행 로봇을 집어 던져서 ‘로봇 학대’ 논란이 일었다는 소식을 듣고 솔깃했다. 로봇이 한국 대통령 선거의 화제로 떠올랐으니 이에 대해 에세이 숙제를 내도 좋겠다 싶었다. 로봇과 한국 정치의 관계를 논하시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은 대선 후보가 로봇을 바닥에 던진 사건에서 꽤 많은 것을 읽어냈다. 이재명 후보에게 ‘감정이입 능력’ 또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동물처럼 생긴 로봇을 단지 ‘사물’로만 대하는 행위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당의 전재수 의원은 “제가 살다 살다 동물 학대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로봇 학대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시사 프로그램이 대학 로봇 수업용 토론거리를 던져주고 있었다. 로봇은 학대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논하시오.

‘로봇 학대’ 논란 사흘 후에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합동토론회에서는 윤석열 후보의 개에 대한 발언이 화제에 올랐다. 유승민 후보가 개 식용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청하자 윤석열 후보는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그것을 국가 정책으로 삼으려면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문제를 개인 선택으로 남겨두면 ‘반려동물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도 윤석열 후보는 반려견과 식용견은 따로 키우고 있지 않냐고 하면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개 식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데에는 합의가 필요하고, 이는 “차별금지법하고 똑같은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차별금지법 언급에 반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개를 목적에 따라 달리 취급하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인종차별과 유사”(맛칼럼니스트 황교익)하다는 비판이 널리 인용되었다.

한 후보는 로봇을 함부로 대했다고 비난을 받고, 다른 후보는 개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를 지켜보는 정치인들은 앞으로 개와 로봇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와 로봇에 대한 태도를 놓고 티격태격하던 정치인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모처럼 의견 일치를 보았다. 올해 11월10일이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민동의 청원 심사 기한을 2024년 5월29일로 미루자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다. 개와 로봇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다급하게 논쟁하던 이들이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차별하지 말자는 논의를 최대한 늦추기로 느긋하게 합의했다.

이제 학기말 과제가 남았다. 개, 개 모양 로봇, 인간 모양 로봇, 인간 사이의 위계와 관계에 대해 논하시오. 20대 대통령 선거는 개와 로봇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기준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음을 보여준다. 식용견과 반려견을 별도로 취급하는 행위는 인종차별과 비슷하다고 한다. 개처럼 생긴 로봇을 밀고 던지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개 식용에 대한 정책을 만드는 것은 차별금지법처럼 민감한 일이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더 미루자고 한다. 각자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라 의견을 내다 보니 동물과 기계와 인간의 위상과 가치가 계속 바뀌고 있다. 수업 과제로는 흥미로울지 몰라도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광경이다.

이 주제만으로 티브이 토론을 해주면 좋겠다. 개와 로봇과 인간에 대한 후보님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개와 로봇과 인간에 대한 학대와 차별 중 가장 나중에 합의하고 입법해야 할 사안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개와 로봇과 인간에게 어떤 대통령이 되려고 합니까. 모든 후보가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피력해준다면, 답답할 것만 같았던 이번 선거가 한국에서 ‘포스트휴먼 정치’ 혹은 ‘인간 너머의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될 수도 있겠다. 개의 대통령, 로봇의 대통령, 그리고 인간의 대통령이 될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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