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에 대한 국가장의 결정과 시행을 지켜보면서, 나는 영화 ‘밀양’에서 아들의 유괴살해범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참회해서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할 때, 이젠 용서할 기회조차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그 엄마가 떠올랐다. 언필칭 민주정부가 국가폭력의 가해자가 죽었다고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피해자들에게서 진실도 사죄도 용서도 모두 빼앗아 가는 것이다.
김명인|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1987년 12월17일 이른 아침을 잊지 못한다. 참담한 울분과 배신감, 그리고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랐던 숙취를 마치 커다란 십자가처럼 이끌고 하룻밤 사이 먼 외국의 어떤 도시처럼 낯설어진 서울 거리로 나서야 했던 그 아침을. 그 전날은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양김의 분열로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음에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결국 전두환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저지른 공동정범이며, 또 신군부 독재정권의 계승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1%….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숫자들이 나열되었고 박정희 사후 8년 동안 배반의 역사를 되돌려놓기 위해 기관총에 난사당하며, 총검에 찢기고 꿰뚫리며, 고문대에서 절명하며, 쫓기다 떨어져 죽으며, 자기 몸에 불을 지르며… 그렇게 민주주의의 제단에 바쳐진 모든 희생들이 그 허탈하게 나열된 숫자들과 욕되게 교환되었다.
그날 오후에는 구로구청에서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며 증거로 추정되는 투표함을 지키며 농성을 시작했고, 그 농성자들은 사흘 뒤인 12월20일 마치 1980년 5월26일 새벽 전남도청을 지키던 광주 시민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중 무려 200여명의 학생, 시민들이 구속되었다. 그 소식을 늦게서야 접했던 나는 구로구청에 합류하지 못해 발을 구르며 속절없이 그 처절하고 무자비한 폭력진압의 전말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후 29년이 지난 201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치학자들의 참관 아래 부정투표의 증거로 확보되었던 그 투표함을 개봉하였다. 결과는 그 함에 들어 있던 4325표 중 노태우 3133표(72.4%), 김대중 575표(18.3%), 김영삼 404표(9.3%) 등이었다. 그리고 그 선거에서 구로구 전체의 개표 결과는 김대중 34.2%, 노태우 28.6%, 김영삼 26.4%, 김종필 10.8%였다. 그 현격한 차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쨌든 그는 1988년 2월에서 1993년 2월까지 5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1995년 11월에 형법상 내란죄와 막대한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되어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판결 받았으나 그해 1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런 그가 지난 10월26일 89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런 그를 정부는 ‘국가장’이라는 예우로 장송하였다. 그의 내란죄 판결은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박정희 사후 합법적인 승계 정부인 최규하 정부를 사실상 전복했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전두환과 함께 5·18 광주시민학살의 주범이었다는 혐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러한 끔찍한 반국가사범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성대한 장례의식을 치러준 것이다. 국가장법에 의하면 국가장의 대상은 ‘전·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 조항만 본다면 그에 대한 국가장의 예우는 합법적이다. 하지만 그는 내란죄 확정판결로 인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일체를 박탈당한 전과자 신분이 되었으므로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만, 그 실체는 부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런 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정상참작론에 기대어 국가장을 강행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재임 시에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펴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는 것과 광주학살에 대해 명시적으로 직접 사과한 바는 없으나 아들 노재헌을 시켜 수차례 광주영령들 앞에서 사죄의 뜻을 표하게 했다는 것, 막대한 추징금을 전부 납부하는 성의를 보였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범죄자로 판명 난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저잣거리의 인정세태 문제가 아닌 역사적 정의의 실현 문제로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정의는 진실을 둘러싼 기억투쟁을 통해 실현된다.
노태우가 내란의 주범이자 광주학살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그가 재임 중에 이른바 북방외교를 통해 러시아, 중국 및 여러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를 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실현한 것,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 역시 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북아 냉전체제의 해체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도모하려는 외압의 결과이지 그가 외적 장애를 무릅쓰고 일군 성과가 아니다. 그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민주적 변화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통 사람’ 운운하며 마치 민주화의 선도자처럼 행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가 재임 1년차에 88올림픽을 치르고 나서 2년차부터는 이른바 친북좌파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탄압함으로써 군부독재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낸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공포의 공안정국은 마침내 1991년 봄의 타살, 분신, 투신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봄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대미를 장식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반인권적 범죄조작 사건은 민주화운동 전체를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어쩌면 여기에 부정선거에 의한 당선 혐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그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이 역사적 정의에 합당한 일인가.
그가 여러차례 5·18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했다고 하여 사과는커녕 부인으로 일관하는 전두환과 비교하여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자기가 5·18에 무한 책임이 있다거나 불미스러운 과오가 있었다거나 하는 말은 진정한 사죄도, 용서를 구하는 행위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했기에 무한 책임이며, 무엇이 불미스러웠던가는 영원히 밝히지 않았다. 사죄도 용서도 모두 진실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치 떨리는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 양심의 가장 밑바닥에서 길어 올려지지 않은 사과는 백번 천번을 한다 해도 피해자는 물론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한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통석의 염’을 반복해도 식민지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우리의 목마름이 전혀 가시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태우에 대한 국가장의 결정과 시행을 지켜보면서, 나는 영화 <밀양>에서 아들의 유괴살해범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참회해서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할 때, 이젠 용서할 기회조차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그 엄마가 떠올랐다. 언필칭 민주정부가 국가폭력의 가해자가 죽었다고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피해자들에게서 진실도 사죄도 용서도 모두 빼앗아 가는 것이다. 이 정부가 광주항쟁 정신을 계승한 민주정부라면 더욱 그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