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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금강산관광, 어느 실향민의 수구초심

등록 2021-11-08 14:42수정 2021-11-09 02:33

이제훈의 1991~2021 _15

첫 금강산 관광객 가운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집을 나서기 전 자식들을 불러 모아 유산 분배를 포함한 ‘유언’을 하고 배에 오른 실향 노인이 숱했다. ‘공산당이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도 가로막지 못한 비장한 수구초심이다. 정주영과 관광객들만 비장한 건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신탁통치’의 위기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도 금강산관광사업으로 ‘평화경제’의 혈로를 뚫는 데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500마리의 ‘통일소’와 함께 방북해, 1989년 북쪽과 맺은 의정서를 근거로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새로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500마리의 ‘통일소’와 함께 방북해, 1989년 북쪽과 맺은 의정서를 근거로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새로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금강산 일대 공동 개발 확정”

<한겨레신문> 1989년 2월2일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국내 경제 인사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전날 일본 오사카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당국과 ‘금강산관광사업’에 합의했다고 밝혔다는 보도다.

정주영이 밝힌 방북 성과는 크게 세가지. 첫째 금강산 공동 개발, 둘째 시베리아 개발 공동 참가, 셋째 합작투자회사 설립 추진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금강산’에 쏠렸다. 정주영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에 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989년 정주영의 방북은 ‘쇼크’를 일으켰다. 현대그룹의 노동자 탄압을 연일 맹비난하던 강한 ‘반재벌’ 성향의 신생 진보지 <한겨레신문>이 “정주영씨가 거둔 성과는 7천만 겨레의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호평했을 정도다.

그럴 만했다. ‘휴전선 오가며 금강산 구경’은 1989년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과 상상력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예컨대 정주영은 당시 남북을 오갈 때 ‘서울(김포공항)-오사카-베이징-평양(순안공항)’을 거치느라 중간에 비행기를 세번씩 갈아타야 했다. 당시 남북 사이엔 지금의 동서해 직항로와 경의선·동해선 도로·철도가 없었다. 중국과 외교관계가 없어 김포-베이징 직항도 없었다.

정주영의 방북 성과를 접한 당시 노태우 정부의 첫 반응은 뜨거웠다. 통일원·국가안전기획부와 경제기획원·상공부·건설부 등 범정부부처를 아우른 ‘긴급합동대책반’을 꾸려 금강산 사업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이상한 일’이 꼬리를 물었다. 정주영의 김포공항 귀국 회견 다음날인 1989년 2월4일 박세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주요 언론사 정치부장을 안기부로 불러 정주영이 평양에서 “위대한 김일성 장군” 어쩌고 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영상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조장했다. 2월8일 노재봉 대통령 특보는 청와대 수석 회의에서 “정주영 회장의 북한 방문은 적성국가와의 외교 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한 문제”라고, 노태우 대통령 면전에서 정주영의 방북을 ‘불법 방북’으로 규정했다. 같은 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정주영의 방북 결과를 보고받고 “경제 부처 주관의 대외경제협력위원회와 잘 연계해 추진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을 정면 ‘공격’한 셈이다.

정주영은 방북 전에 노 대통령과 박철언 대통령 정책보좌관을 만나 방북 계획을 보고하고 ‘사전 승인’을 받았다. 더구나 노 대통령의 ‘7·7 특별선언’과 그에 따른 ‘남북 경제인의 상호 방문 및 접촉’ 허용 발표(1988년 10월7일) 이후 경제인의 첫 공개 방북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상공부는 1989년 1월19일 정주영의 방북을 승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방북 승인권이 통일부로 일원화되기 전의 일이다.)

그러므로 노재봉의 ‘불법 방북’ 운운은, 정주영의 방북과 관련한 권력 내부의 심각한 균열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신호였다. 결정타는 군부의 견해를 대변해온 박세직 안기부장이 날렸다. 1989년 2월18일 박세직은 자신이 위원장을 맡은 ‘북방정책조정위원회’ 회의를 열어 정주영이 북한의 최수길 조선아시아무역촉진위원회 고문과 합의·서명한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의정서를 “사(私)문서로 법적 효력이 없다”고 결정했다고 박철언은 회고록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 적었다.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한다”던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결정은, ‘금강산 관광·개발’이라는 역사적 합의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 반공주의 세력의 ‘안보 프레임’이 갓 세상에 나온 7·7선언의 ‘교류협력 프레임’을 압도한 결과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휴전선 이북인 강원도 통천 출신의 실향민인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1997년 12월 사상 첫 정권교체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결실을 거두기 시작한다.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세번째 가출할 때 아버님의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 한마리 소가 천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고향 산천에 갑니다.”

1989년으로부터 9년이 흐른 1998년 6월16일 정주영이 500마리의 ‘통일소’와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에 국내외 언론 앞에서 읽은 “출발 인사말”의 한 구절이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시엔엔>(CNN)을 타고 지구 구석구석까지 알려졌다. 정주영은 그때 1989년 의정서를 근거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와 ‘금강산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새로 썼다.

넉달 뒤인 1998년 10월30일 정주영은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개발과 경협 사업 추진을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정주영은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을 만난 첫 한국인이다.

첫 금강산 관광객 826명을 포함한 1418명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1998년 11월18일 오후 5시43분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14시간여 만인 이튿날 아침 8시께 금강산 장전항에 닻을 내렸다. 남북 분단사 최대·최장 교류협력사업인 금강산관광의 시작이다. 어느 실향민의 수구초심이 하늘 끝까지 가닿은 분단의 장벽에 작은 숨구멍을 낸 것이다. 첫 금강산 관광객 가운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집을 나서기 전 자식들을 불러 모아 유산 분배를 포함한 ‘유언’을 하고 배에 오른 실향 노인이 숱했다. ‘공산당이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도 가로막지 못한 비장한 수구초심이다.

정주영과 관광객들만 비장한 건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신탁통치’의 위기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도 금강산관광사업으로 ‘평화경제’의 혈로를 뚫는 데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 1998년 여름, 한반도 정세는 짙은 안갯속 지뢰밭과 같았다.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을 불지폈다. 김정일은 3년의 유훈통치를 끝내며 장거리 로켓 대포동 1호를 쏘아 올려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었다. 그에 앞서 6월22일엔 동해에서 북의 잠수정이 발견됐다. 나라 안팎에서 금강산관광 반대 목소리가 분출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흔들렸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동반자’인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고언을 받아들여 금강산관광선 출항을 결단했다. 정치군사 상황과 교류협력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정경분리 원칙’을 앞세웠다. 실상은 “금융위기에 안보위기까지 겹친 이중적 도전”에 맞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고 “남과 북이 모두 경제 회생의 전기”를 열려는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김대중·임동원의 모험은 성공했다. 1998년 11월20일 저녁 6시 두번째 관광선 현대봉래호가 동해항에서 떠나는 모습을 서울 신라호텔에서 텔레비전으로 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다음날 김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에 감동했다며, 앞으로 대북 문제는 “김 대통령께서 운전석에 앉으시고 나는 조수석에서 돕겠다”고 약속했다고 임동원은 회고했다. 극단의 안보위기가 금강산관광을 매개로 한국 주도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가동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금강산관광을 고리로 한 현대와 북쪽의 소통·신뢰는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사전 비밀접촉 협의 창구로 쓰이는 등 남북의 든든한 숨구멍 구실을 했다.

금강산관광은 남북 교류협력사에서 규모와 위상이 압도적이다. 바닷길만 이용하던 금강산관광은 2003년 9월1일부터 육로관광으로 확장됐다. 그날 이후 남쪽의 일반 시민들은 날마다 관광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 유람길에 올랐다. 1998년 11월18일~2008년 7월11일 사이에 모두 193만4662명(해로관광 55만2998명, 육로관광 138만1664명)이 금강산에 다녀왔다. 2008년 7월11일 새벽 박왕자씨가 관광객 출입이 금지된 해변을 걷다 조선인민군 경계병이 쏜 총에 맞아 숨진 다음날 멈춘 ‘금강산관광 시계’는 14년 가까이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금강산관광이 다시 시작되는 날, 한반도의 평화도 가을볕을 받은 벼이삭처럼 무럭무럭 자라날 터다.


이제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_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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