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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족 대여 서비스

등록 2021-11-04 18:16수정 2021-11-05 02:32

[크리틱] 김영준|열린책들 편집이사

아내는 죽고, 딸은 집을 나갔다. 갑자기 혼자가 된 도쿄의 니시다씨는 텅 빈 집이 두려워졌다. 어느 날 그는 티브이(TV)에서 시간제로 가족을 대여한다는 광고를 본다. 업체 이름은 ‘가족 로맨스’. 요금은 그가 부담 가능한 수준이었다.

첫날 아내 역과 딸 역의 두 여성이 찾아와 두 시간 동안 가족처럼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만족한 니시다씨는 단골이 되었다. 이제는 친구같이 된 이들은 가족 연극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들의 실제 생활 얘기를 주고받는다. 얼마 전 니시다씨는 ‘가짜 딸’의 권유로 용기를 내어 진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족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은 다양하다. 학예회 때 한부모 가정인 것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학부모.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자친구를 보여줘야 하는 미혼 여성 등. 취재하러 온 <뉴요커> 작가 엘리프 바투만이 서비스를 이용해봤다. 어머니 역의 일본 중년 여성과 시내를 관광하는 것이다. 진짜 어머니와 닮았을 리가 없는 사람과 두 시간 동안 ‘엄마-딸’ 놀이를 하던 바투만은 어느 순간 이 여성이 “신통한 점쟁이처럼 정확한” 말을 던진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 중간에 그녀가 생활고를 한탄할 때 바투만은 거의 육체적 고통을 느끼기까지 한다. 예상할 수 있듯 바투만은 결말에 ‘전이’(유아 때 부모와 맺었던 관계를 치료자와 반복하는 것) 개념을 끄집어낸다. 가족 대여 서비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부재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불러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적인 서비스였던 것이다. 바투만은 역으로 심리치료라는 것 자체가 치료자가 부모 역을 맡는 일종의 가족 대여 서비스가 아닌가 자문해본다.

‘사람들은 가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묻는 이 기사는 2018년 전미잡지상을 수상했다. 지금 이 기사를 클릭하면 이런 경고가 뜬다. “최근 일본 방송사의 취재 결과 여기 등장한 사례 몇개가 위조임이 밝혀졌습니다. ‘가족 로맨스’의 고객 니시다씨는 실제로는 이 회사 직원이며, 다른 사례에서 자신을 한부모 엄마로 소개한 여성은 회사 사장의 아내였습니다.” 이어 바투만과 <뉴요커>의 팩트체크팀이 함께 속아 넘어간 데 대한 장황한 변명이 이어진다. 이름조차 가짜인 인터뷰 대상자들 앞에서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외국 아닌가? 결국 이들은 순진한 서방 방문자의 역할, 즉 주민들의 소박한 모습에 감탄하지만 마을 전체가 세트장인 건 눈치채지 못하고 나오는 유서 깊은 바보 역할을 재현한 셈이 됐다.

알다시피 영화 <트루먼 쇼>에는 오직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가짜 마을이 등장한다.(줄거리가 워낙 유명하니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 끔찍한 것은 마을 사람 누구도 트루먼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점이다. 어찌 이런 잔인한 공모가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이건 리얼리티 쇼가 아니며, 속고 있는 건 트루먼이 아니라 시청자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의 트릭은 이런 것이다. 트루먼이 속고 있는 한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속지 않는 자 편에 있다고 느낀다. 트루먼이 바보같이 속아 넘어갈수록 시청자는 더욱 이 쇼를 신뢰한다.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자를 봐도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오히려 체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건 속거나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거기에 속하느냐일 뿐이니까.

<뉴요커>의 망신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취재진은 그들의 믿기 힘든 말들을 모두 믿었다. 가짜 가족이라도 붙들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해해줘야 할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내려다볼 대상이 나타나면 우리 마음은 편해진다. 크게 속을 준비는 이런 식으로 마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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