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흔적들을 찾아 나설 때면 이 구절이 떠올라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 보려고 하는 건지, 어떻게 기록하려는 건지 초점이 뚜렷하지 않아 매 순간 방황했다. 나는 다만 학살 현장의 비참함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지는 않으려 했고, 구천을 떠도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깨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지만, 대부분 사진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학살터였던 르완다 은타라마 제노사이드 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온통 붉은 황톳길이었다. 은타라마/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르완다의 도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수도인 키갈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흐릿했다. 길거리에선 사람과 차량이 뒤엉키는데, 신호등이나 중앙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로에 사람이 걸어가든 말든 대다수 운전자는 브레이크 사용을 최대한 삼가는 듯했다. 행인도 차를 피하는 대신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걸었다. 속도가 붙은 차량과 사람이 굳이 서로를 피하려 들지 않았으니 사고는 다반사였을 것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풍경 속에서 1994년 르완다를 휩쓴 대량학살을 떠올렸다.
2014년 내가 찾은 르완다의 땅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대량학살 당시 손도끼와 마체테에 희생된 투치족의 피로 물든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의 살육이 벌어지던 때는 비가 많던 우기였다. 붉은 흙길에 흘러내린 희생자의 피는 빗방울에 튀어 르완다 곳곳에 피비린내를 퍼뜨렸다. 르완다에 머무는 동안 비가 쏟아지면 붉은 흙길에서 올라온 비릿한 냄새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 길을 따라 대량학살 당시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를 비롯해 제주 4·3, 캄보디아 킬링필드 등 학살터의 흔적들을 되짚어갈 때면, 플라톤이 쓴 <국가>의 몇몇 구절이 내내 귓속에 맴돌곤 했다. 그 구절은 <국가> 10권 가운데 4권에 나오는 ‘욕구와 절제’ 관련 대화편인데,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는 어느 집에서 나와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북쪽 성벽 외곽에 이르렀다. 그는 사형 집행자 옆에 시체 몇구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애써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갈등을 느끼며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결국에는 보고 싶다는 욕구에 못 이겨 손을 치우고 시체 쪽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빌어먹을 이놈의 눈, 그래 실컷 봐라, 실컷 봐”라는 대목이다.
학살의 흔적들을 찾아 나설 때면 이 구절이 떠올라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 보려고 하는 건지, 어떻게 기록하려는 건지 초점이 뚜렷하지 않아 매 순간 방황했다. 나는 다만 학살 현장의 비참함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지는 않으려 했고, 구천을 떠도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깨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지만, 대부분 사진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유해를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볼 때마다 희생자의 고통을 떠올리며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보기도 한다.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대량학살 현장을 한 곳씩 찾아다니면 다닐수록 더 많은 궁금증이 생겼고, 반드시 풀어내야만 할 것 같은 숙제들이 머릿속에 쌓여갔다. 어쨌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도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리듯 현장으로 가야 했는데, 그곳의 끔찍한 흔적들을 최대한 절제된 앵글로 찍어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기자로서, 혹은 사진기를 들고 있는 사진가로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되는 운명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런 스스로의 위안과 변명이 없었으면 지난 15년간 ‘민간인 대량학살’의 기록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여정을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르완다 최대의 학살터 가운데 한 곳인 니아마타 제노사이드 기념관 내 지하무덤엔 잘 닦아서 정리한 유해 1만여구가 모셔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전등 서너개가 무덤 속 어둠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반지르르한 두개골에 반사된 전등 빛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내 망막까지 가까스로 닿을 정도였다. 무덤 속 어슴푸레한 빛은 한 많은 유골이 편히 영면에 들도록 위로하는 듯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유골들은 가여워 보였다. 그 느낌은 ‘연민’으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해 아직도 명확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무겁다. 그런 내적 고민과 구실을 대며 나는 1994년 4월 100일 동안 100만명, 하루 1만명꼴로 희생된 르완다 제노사이드 현장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