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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을 엔딩, 양화한강공원

등록 2021-10-28 18:42수정 2021-10-30 14:47

<오징어 게임> 마지막 회의 무대로 등장한 양화한강공원, 오피스박김 설계. 배정한 사진
<오징어 게임> 마지막 회의 무대로 등장한 양화한강공원, 오피스박김 설계. 배정한 사진

[크리틱] 배정한ㅣ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세계 전역에서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 촬영 장소들도 관심을 끌고 있다. 무참한 사살이 벌어진 첫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끝나고 모래 운동장의 천장이 닫히면서 정체를 드러내는 시(C)자형 미지의 섬은 인천 옹진군의 선갑도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보면 선갑도에 이미 ‘오징어 게임 섬’이라는 별명이 달렸다. 1화 첫 장면에서 어린 시절의 성기훈(이정재)과 조상우(박해수)가 친구들과 오징어 게임을 하는 흑백 장면의 촬영지는 인천 교동초등학교인데, 이곳 역시 성지 순례지의 하나로 등극했다.

악역 장덕수(허성태)가 조직원과 접선한 월미도의 마이랜드는 모처럼 관광객으로 붐빈다고 한다. 상우 어머니가 생선가게를 한 쌍문동 백운시장이 지역 명소로 떠올랐고, 기훈과 오일남(오영수)이 생라면에 깡소주를 마신 씨유(CU) 쌍문우이천점 야외 의자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려면 긴 줄을 참아내야 한다. 기훈이 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상계동 주택가 민지미용실 골목도 북적거리고, 심지어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에 가면 기훈과 공유처럼 딱지치기 하는 사람들을 적잖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스토리보다 배경 장소에 몰입하는 편인데, 마지막 9화 ‘운수 좋은 날’에 나의 최애 공원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고야 말았다. 참혹한 서바이벌 게임 최후의 승자가 되어 456억을 받은 뒤 넋이 나간 채 1년간 상금을 전혀 쓰지 않고 폐인처럼 살아가던 기훈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어느 강가 돌무더기에 주저앉아 병째 소주를 들이붓는 장면. 멀리 흔들리는 도시의 불빛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어둡고 거친 그 강변, 양화한강공원이다.

삼단 시멘트 테라스로 구성된 다른 한강변 둔치 공원들과 달리, 양화한강공원은 넉넉한 초지와 빽빽한 숲으로 풍성하다.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다 못해 고즈넉하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처럼 찰랑대는 강물 바로 앞까지 내려가 하염없이 ‘물멍’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을 그대로 둔 것 같은 이 공원은 사실 한강의 수문학적 특수성을 면밀하게 살린 실험적 조경 설계와 엔지니어링의 산물이다.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제적으로는 널리 조명된 한국 현대 조경의 대표작이다.

양화한강공원을 설계한 조경가 박윤진과 김정윤(오피스박김)이 주목한 건 한강의 뻘이다. 여름에 범람할 때마다 둔치에 쌓이는 엄청난 양의 뻘이 원활하게 들고 날 수 있도록 제방형 둔치를 해체하고 지형을 다시 디자인했다. 지형으로 뻘을 다루고 뻘을 이용해 새로운 식물 생태계가 자리잡도록 했다. 수위가 올라가면 호안 형태가 변하고 물과 뭍의 경계가 사라진다. 급사면을 벌려 둔치에서 강가로 완만하게 이어지게 만든 여러개의 아름다운 경사면 덕분에 공원 어디서나 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계단과 급경사 없이 물가로 내려갈 수 있다.

몇년 만에 양화한강공원을 다시 찾았다. 완만한 지형과 예리한 동선에 풍성한 수목이 병치된 풍경 속을 걷는 산책자들, 거친 사석 호안에 발 딛고 가을 강바람 맞으며 낚싯대를 드리운 중년의 사내들, 버드나무 숲 넓은 그늘에 마주 보고 누운 연인, 삐죽한 미루나무 곁 간이 의자에 몸을 맡긴 모녀. 가장 부러운 이는 헬멧도 벗지 않은 채 잔디 사면에 대자로 누워 낮잠을 즐기는 어느 자전거족이다.

성기훈처럼 흐르는 강물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는 건 지나치게 진부하지 않은가. 공원 매점에서 오징어땅콩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물가에 앉았다. 같은 장소에 앉아 같은 강물에 취한다고 갑자기 이정재처럼 잘생겨지거나 456억이 생길 리 없지만, 겨울을 나기 위해 마음속 깊이 가을을 저장하기에는 충분했다.

&lt;오징어 게임&gt;에서 성기훈(이정재)이 앉아 소주를 들이켜는 자리, 양화한강공원. 김종오 사진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이정재)이 앉아 소주를 들이켜는 자리, 양화한강공원. 김종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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