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종교] 구형찬ㅣ인지종교학자
서로 다른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분들과 몇권의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는 어떤 신흥종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책을 읽었다. 해당 종교를 특별히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서술을 배제한 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들을 덤덤하게 알려주는 책이었다. 흥미롭고 유익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소수였다. 참석자의 다수는 저자가 해당 종교를 지나치게 편들고 있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토론은 이어지지 않았고 그날의 모임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양한 문장과 문서를 맥락에 따라 적절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문해력’이라고 한다. 교육부의 ‘2020년 성인문해능력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20.2%가 공공 및 경제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려 약 889만명에 해당하는 수치다. 놀랍게도 그중 약 200만명의 문해력은 초등학교 1~2학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사회의 낮은 문맹률과 높은 교육열에 비추어 보면 의외의 결과다.
개인의 문해력은 ‘가방끈 길이’가 결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정보 환경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회가 요구하는 문해력의 성격과 수준이 달라지기도 한다. 요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이나 ‘미디어 문해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문해력이 요청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의 다이앤 무어 박사는 ‘종교 문해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 문해력이란 “종교와 사회, 정치, 문화 생활의 근본적인 교차점을 다양한 렌즈를 통해 식별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현대 세속사회에서 종교 문해력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종교학자 류성민 교수는 “문맹이 무지를 낳고, 무지가 편견과 오해와 적대감을 낳듯이, 종교적 문맹도 마찬가지다. 무식하면서 용감하면 폭력이 앞서듯이, 종교를 모르면 차별과 편견과 증오만 키우게 된다”고 말한다.
주의할 점이 있다. 종교 문해력은 특정 종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올해 4월 영국 의회가 발간한 보고서에는 언론인들의 종교 문해력을 향상시키고 종교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여러 종교계 매체들이 그 소식을 반갑게 전했다. 언론인들의 종교 문해력이 향상되면 종교의 교리와 실천이 더 공감적으로 기사화되고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쉽게 동조하게 될 것을 기대한 걸까? 그러나 종교 문해력은 초월적인 규범과 당위를 외치는 특정 종교의 이상과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 문해력의 핵심은 한편으로 각 종교의 이상과 주장을 편견 없이 이해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읽어내는 능력에 있다.
한국은 세속국가이자 다종교사회다.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런저런 종교를 신앙한다. 심지어 한식구들끼리 서로 종교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종교 문해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서로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과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스스로 종교를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종교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스 뮐러의 말이 맞다면, “하나만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종교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일은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