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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그럴 리 없다

등록 2021-10-21 16:12수정 2021-10-22 02:34

아드리안 판데르스펠트, <커튼이 있는 꽃 정물>, 1658, 나무에 유채, 46.5×63.9㎝, 시카고미술관, 시카고
아드리안 판데르스펠트, <커튼이 있는 꽃 정물>, 1658, 나무에 유채, 46.5×63.9㎝, 시카고미술관, 시카고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옛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실제 존재하듯 생생하게 모방하는 행위로 미술을 이해했다. 그리스 최고의 화가 제욱시스가 마을 담벼락에 포도나무를 그리자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다음 이야기는 그가 파라시오스와 경합을 벌이던 날의 일이다. 경쟁자의 집을 방문한 제욱시스는 거실에 놓인 그림 위에 커튼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어서 걷어보시오’라고 했다. 그 커튼이 바로 그림일 줄이야.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저서 <예술과 환영>에서 제욱시스가 깜빡 속은 이유는 파라시오스가 극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제욱시스는 왜 착각했을까? 영화 <베스트 오퍼>(2013)에 힌트가 있다. 경매에서 ‘베스트 오퍼’란 인생 최고 작품에 최고가를 부르는 경우로, 카지노 용어 ‘올인’에 상응한다.

주인공 버질(제프리 러시)은 미술품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이름난 경매사다. 남 주기 아까운 작품이 경매에 올라오면 버질은 친구와 미리 짜고 낙찰받게 한 후 뒷거래를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결벽증이 있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있는 버질의 유일한 기쁨은 비밀스러운 수장고를 열고 들어가 지금껏 모은 수백점의 소장품에 오롯이 둘러싸여 있는 순간이다. 미녀의 초상화들을 내밀하게 자신의 밀폐된 공간에 모셔두고 혼자서만 황홀하게 바라보며 즐기는 버질. 그런 그에게 아무에게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스스로 감금 생활을 하는 여자, 클레어가 나타난다.

클레어는 자신은 어릴 적부터 은둔했다고 버질에게 털어놓으며, 프라하의 시계탑 앞에 있는 온통 시계로 꾸며진 카페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푹 빠진 버질의 모습을 보며 친구는 조언한다. “미술품처럼 사람의 감정도 위조가 가능해. 기쁨, 고통, 증오, 심지어 사랑까지도 속일 수 있지. 보기엔 진품과 똑같아 구분하기 어려워.” 미술품의 진위를 파악하는 예리한 눈을 가진 버질이라 해도 클레어의 진심까지 볼 수는 없다는 복선이다.

마지막 걸작으로 실제 미녀를 아내로 맞은 버질은 더 이상 수집의 열정이 생기지 않는지 은퇴를 결심한다. 그런데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온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평생을 함께해온 여인의 초상들이 전부 사라진 텅 빈 비밀 수장고였다. 완벽하게 사기당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버질은 프라하로 간다. 그리고 시계로 가득한 카페를 찾고는 안도한다. 적어도 클레어가 말한 그 카페만큼은 허구가 아니니, 진심은 있다고 믿고픈 것이다.

곰브리치는 제욱시스가 커튼 그림에 속은 이유는 커튼 뒤에는 당연히 그림이 있다고 미리 판단한 탓이라고 한다. 속임을 당하는 것은 순진한 눈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캐묻기 좋아하는 정신이다. 정신은 합리적이고 의심하는 것에 뛰어나지만, 때로는 맹목적으로 선입견에 사로잡혀 휘둘리기도 한다. <베스트 오퍼>의 버질 역시 자기최면에 걸려 거짓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제욱시스와 버질은 진작부터 속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눈은 스스로 옳다고 믿거나 원하는 방향대로 볼 뿐이어서 진위를 가려낼 능력은 부족하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는 치밀한 유사성이나 인과관계가 반드시 요구될 것 같지만, 아니다. 관건은 상대가 믿고 받아들이게끔 분위기를 조장하고 상황을 진실로 몰아가는 과정에 있다. 어떤 것을 정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과는 별개로, 이미 자기만의 논리가 결정되어 있다. 뚜렷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사기였음이 명백히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논리는 지속될 것이다. “그럴 리 없어”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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