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 칼럼] 김순배|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신자유주의 천국’ 칠레에 거대한 변화의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35살의 좌파 대선후보 가브리엘 보리치 하원의원이 차기 대통령 자리에 다가서고 있다. 지난 4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22%의 지지율을 얻어, 극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15%)와 중도우파 세바스티안 시첼(12%), 중도좌파 야스나 프로보스테(12%) 후보를 앞섰다. 응답자의 37%는 그가 오는 11월21일 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보다 한살이 어리다. 당선되면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탄생한다.
이준석 대표가 제1야당의 최연소 대표에 오른 것은 한국 정치의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나타낸다. 보리치의 부상은 칠레 사회 밑바닥의 강력한 사회개혁 요구와 낡은 정치 세력, 패러다임 교체의 갈망 등을 상징한다. 2011년 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 당시, 보리치는 칠레대 총학생회장으로 사회개혁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런 사회적 열기는 보리치가 28살이던 2014년 하원 진출로 이어졌고, 그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리더로 자리잡았다. 투쟁 이력이 말하듯, 이 대표처럼 깔끔한 양복 차림의 모범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줄무늬 티셔츠와 흐트러진 머리, 덥수룩한 수염은 혁명가 체 게바라를 얼핏 연상시킨다.
그의 공약은 칠레 사회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수술을 제안하고 있다. 민영과 공영으로 양분된 의료보험의 단일화, 민간에 맡겨진 연금제도의 공영화 및 기초연금제 도입, 신자유주의 교육 모델 개혁 및 교육권 보장, 원주민 자치권 인정, 부자 증세, 노동권 강화 및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 지방분권 및 지방자치 강화 등이다. 그가 대표하는 좌파 선거연합에는 공산당까지 참여해서 “급진 좌파”라고 공격받는다. 우파는 그를 가리켜 “지도자보다 게릴라에 가깝다”고, 공약에 대해선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술주정”이라며 비난한다. 하지만 그의 말과 정책에는 변화의 갈망, 미래에 대한 담대한 꿈과 패기가 담겼다.
‘아직 어리다’는 불안한 시선도 떨치고 있다. 9월 말 토론에서 논란을 피하면서 안정감을 심어줬고 토론의 승자로 꼽혔다. 경선에서 유력 공산당 후보를 제친 것도 상대적으로 타협적이고 합리적인 태도 덕분이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에 대한 탄핵 요구가 들끓던 2019년 말 대규모 반정부 시위 때는 새 헌법 제정을 통해서 출구를 찾은 정치적 합의에 동참하며 절차적 제도 개혁에 힘을 실었다. “우리 정부는 거대한 변화를 추진할 것이다, 한걸음씩, 누구도 빼놓지 않고”라는 보리치의 구호는, 전면적이되 점진적인 개혁과 연대의 지향점을 가리키며 중도 유권자에게 다가서고 있다. 반면, 중도좌파는 전통적 지지층의 신뢰를 잃었고, 후보 선출을 둘러싼 자중지란까지 겪고 있다. 중도우파는 중도층을 잡으려다 정통 우파 지지자까지 놓치고 있다.
사회변혁의 열망은 지난 5월 치러진 지방선거와 제헌회의 선거에서 이미 기성정치 세력의 몰락과 무소속 돌풍, 급진 좌파의 부상으로 나타났다. 오는 11월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에서는 하원의원 155명 전원과 상원의원 43명 가운데 27명을 새로 뽑는다. 이 선거에서도 좌파의 선전이 예상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의 개혁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 칠레의 근간을 뜯어고치고 있는 새 헌법까지 내년에 통과되면, 보리치의 말처럼 ‘신자유주의의 고향’ 칠레는 이제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수 있다. 결선투표의 변수가 남았고, 그의 당선과 정책은 우파의 공격처럼 혼란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국민적 열망을 담아 내일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며 심판대에 섰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의 정치와 대선에는 보리치가 던지는 미래를 향한 담대한 비전의 설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