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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성모상 혹은 고양이

등록 2021-10-07 18:15수정 2021-10-09 16:41

[삶의 창] 이명석|문화비평가

늘 지나다니는 길가에 아담한 성모상이 생겼다. 마당도 없는 작은 수도원에서 바깥 화단에 세워놓았는데, 가끔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어느 밤엔 투병 중인 듯 머리를 짧게 깎은 여성이 보호자와 함께 오래도록 기도했다. 택배원이 배달 차량에서 내려 담배를 꺼내다가 다시 넣고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도 보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발이 머문다. 그들이 무엇을 빌었을지 잠시 생각한다. 이게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무신론자인지라 일체의 기원을 하지 않는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아버지가 차에 태워 강제로 절에 데려가도 절대 법당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입 시험 전날 옷에 몰래 부적을 붙여둔 걸 보고선 조용히 뜯어버렸다. 도대체 뭘 빌라는 건가? 그 시간과 비용과 정성으로 문제를 해결할 진짜 방법을 찾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여겼다. 세상사의 불평과 고민을 해결 능력도 없는 성직자들에게 하소연하는 것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조금 달라지게 된 일이 있었다. 예전에 사무실을 옮기고 몇달 뒤에 그 전 사무실의 주인이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는 부동산 중개업체가 모든 걸 맡아 처리해 얼굴도 한번 보지 못했던 터다. 중년의 여자분이었는데, 혹시 사무실을 어떤 조건으로 썼는지 물었다.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말해주었다. “아이고, 부동산이 장난을 쳤네요.” 알고 보니 집주인에게는 전세라고 하고선 몰래 월세를 받아먹었던 것이다. 전세 시세도 속였던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나. 나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혹시 한번 찾아가봐도 될까요?”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수화기를 막고 동료에게 물었다. “왜 보자는 거지?” 동료가 말했다. “뭐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같이 속은 사람들끼리.” “나는 피해자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 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어 주소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진짜로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걸어 다니는 먹구름 같은 중년 여성이 딸과 함께 왔다. 차를 드리고 전화로 말했던 내용을 ‘복붙’하는 데 3분이 걸렸다. 잠자코 듣던 그가 대뜸 말했다. “고양이가 참 예쁘네요.” 그러고 보니 버릇없는 사무실 고양이가 찻잔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를 말리며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별 도움이 안 되어서 죄송….” 하지만 그는 홀린 듯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근데 얘 이름이 뭐예요?” 그러곤 30분 동안 고양이 이야기만 했고, 딸이 눈치를 주자 겨우 일어났다. “다음엔 간식이라도 사서 와야겠다. 또 와도 되지?” 그는 고양이에게 허락을 구하고선 구름을 걷어낸 화창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답을 얻을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라도 푸념해야 하는구나.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구나. 그 대상이 불상이나 성모상이라고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을까? 그 후로 나 역시 절벽 같은 절망을 만났을 때 고양이를 쓰다듬었고, 기도하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초자연적인 힘에 내 문제를 의탁하거나, 성직자에게 답을 구하지는 않는다.

성모상 옆으로는 수도원 건물로 들어가는 야외 계단이 있다. 어느 더운 날 휠체어를 탄 사람이 계단 앞에 멈춰 있고, 그 앞 계단 턱에는 젊은 수사가 어정쩡한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다. 건물 안으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길을 가다 말을 걸었던 걸까? 아무튼 수사가 휠체어 가까이 몸을 낮추고 귀 기울이는 모습이 딱 반가부좌한 불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멀리 떠나버린, 그때의 고양이가 자기를 만지라며 볼을 내밀던 모습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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