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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아프리카 르완다엔 개가 없었다

등록 2021-10-05 18:09수정 2021-11-02 18:32

제노사이드의 기억 아프리카 르완다 _01
피의 살육은 폴 카가메 사령관(현 대통령)이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이 국경을 넘어 르완다로 진격해오며 잦아들었다.
카가메 대통령은 국민통합 정부를 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내가 찾은 르완다 거리에는 개가 없었다.
수도 키갈리 도심은 물론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있는 은타라마,
남서쪽 무람비 등 어디에서도 개를 발견하지 못했다.
르완다의 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대학살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느다히노 패트릭(2014년 당시 23)이 은타라마 대량학살 기념관 내 희생자들의 유골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은타라마/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대학살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느다히노 패트릭(2014년 당시 23)이 은타라마 대량학살 기념관 내 희생자들의 유골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은타라마/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중앙아프리카 르완다는 부룬디와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다. 우리에게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절멸 작전 이후 가장 끔찍한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곳 정도로 알려져 있다. 2014년 4월 내가 르완다를 처음 찾아간 것도 그로부터 20년 전 벌어진 ‘100일간의 참극’, 곧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희생자 추모식 때문이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뿌리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완다는 1900년대 초까지 독일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가운데 한곳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날 무렵 벨기에 식민지로 편입됐다. 벨기에는 식민 통치의 방법으로 유목민 출신인 소수의 투치족을 우대했다. 투치족은 지배계급이 된 반면, 다수였던 후투족은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분할통치, 인종분리 정책이었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며 종족 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지방선거에 이어 대통령선거까지 후투족의 승리로 끝나며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됐다. 정권을 잡은 후투족은 보복에 나섰다. 이후 10여년 동안 줄잡아 2만여명의 투치족이 목숨을 잃었다. 우간다 등 이웃 나라로 몸을 피한 투치족은 무장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을 조직하며 반정부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이런 투치족 반군의 존재는 후투족을 단결시키는 힘이었고, 집권세력은 이를 독재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1993년 후투족 정권과 투치족 애국전선이 권력 분점에 합의하는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수도 키갈리 공항으로 착륙하면서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숨졌다. 후투족은 기다렸다는 듯 투치족 말살에 나섰다. 후투족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박멸’할 것을 선동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지령은 거역할 수 없는 절멸의 명령이었다. 후투족 강경파는 그해 4월7일부터 투치족과 그들을 도운 온건 성향의 후투족까지 찾아다녔다. 중국제 마체테(machete: 밀림에서 주로 쓰는 70㎝ 정도 길이의 날이 넓은 칼)와 손도끼 등을 이용한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100일 동안, 줄잡아 하루에 1만명씩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인데, 후투족 정권은 제노사이드를 앞둔 1993년 중국으로부터 마체테를 사들였다.

“학살 초기에 이를 저지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오히려 르완다에 파병되었던 유엔 평화유지군 전체의 철수를 주장했고, 이 때문에 후투족은 외세의 개입에 대한 불안감 없이 마음 놓고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최호근 고려대 교수의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피의 살육은 폴 카가메 사령관(현 대통령)이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이 국경을 넘어 르완다로 진격해오며 잦아들었다. 카가메 대통령은 국민통합 정부를 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내가 찾은 르완다 거리에는 개가 없었다. 수도 키갈리 도심은 물론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있는 은타라마, 남서쪽 무람비 등 어디에서도 개를 발견하지 못했다. 르완다의 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실마리는 필립 고레비치(작가·언론인)가 쓴 책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에서 찾을 수 있었다. 르완다 대량학살 직후 여섯차례에 걸쳐 현장을 찾은 고레비치는 르완다에서 개가 사라진 이유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제노사이드 직전까지는 르완다에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개가 많았다. 그런데 대량학살로 주인이 목숨을 잃자, 갈 곳 없는 개들이 거리를 떠돌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개들은 길거리에 쌓인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대량학살이 멈춘 뒤, 르완다애국전선 병력과 유엔 르완다지원단은 거리에서 개가 보이면 모두 죽였다. 어른이든 아이든,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 더미 위에서 개가 배를 채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르완다 거리에선 그렇게 사람에 이어, 개들마저 사라졌다.

실제로 나는 르완다에 머문 열흘 동안 시내뿐만 아니라 시골 골목길과 아이들이 뛰노는 공터 등 어디에서도 개를 찾아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또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르완다에서는 사람과 개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을지 가끔 궁금하다.

김봉규ㅣ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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