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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미-중 반도체 전쟁, 동맹·시장·혁신이 승패 가른다

등록 2021-10-04 18:01수정 2021-10-05 02:38

박현의 G2 기술패권 _03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12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글로벌 반도체 기업 대표들과의 반도체 공급망 관련 화상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기판)를 들어 보이며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12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글로벌 반도체 기업 대표들과의 반도체 공급망 관련 화상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기판)를 들어 보이며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중 모두 자국 내 반도체 일관생산체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약점이 있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낮은 생산성으로 제조 경쟁력이 떨어진다. 바이든 행정부는 벌써부터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에 고객정보 등 영업기밀까지 요구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중국은 ‘자력갱생’이라는 기치 아래 점차 내부지향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혁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좋은 동맹은 이런 종류의 장비를 중국에 팔지 않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시절인 2019년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찰스 커퍼먼은 네덜란드 외교관들을 백악관에 초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장비 제조사인 네덜란드 에이에스엠엘(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두고 한 말이었다. 빛을 이용해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기판)에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보다 미세한 회로를 새겨넣는 이 장비는 첨단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장비다. 커퍼먼은 미국산 부품들이 없으면 이 장비도 작동하지 않는다며 백악관이 네덜란드에 이 부품들의 수출통제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대중국 수출금지 조처에 동참하라고 사실상 협박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장비는 중국에 단 한 대도 팔리지 않고 있다.

이 장비의 대중국 수출제한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에이에스엠엘은 미국·독일·일본 등의 기술을 활용해 이 장비를 개발하는데 약 20년이 걸렸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이 장비를 5~10년 내에 자체 개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메모리 반도체)하고, 연산·논리 등 정보처리(시스템 반도체) 기능을 한다. 한마디로 ‘기술의 두뇌’다. 휴대전화·노트북·냉장고 등 소비재뿐만 아니라 에너지·운송·금융·항공·첨단무기 등의 필수 원자재여서 인프라와 국가안보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서 상대방의 목을 조르는 이른바 ‘초크 포인트’(전략적 관문)로 불리는 이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올해 2월 취임하자마자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리고, 관련 글로벌 기업 대표들을 불러 모아놓고 공급망 재구축을 역설했다. 삼성전자도 이 자리에 세차례나 불려 갔다. 올해 6월 나온 공급망 보고서는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기 위해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 미국 내 제조기반 확충, 동맹국과 협력 강화, 중국 제재 강화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관건이 되는 이유는 칩 하나를 설계해 완제품을 생산하기까지 국경을 수십차례 넘어야 할 정도로 분업화가 매우 복잡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 단계를 거치는데, 미국은 설계 부문만 주도하고, 생산과 후공정은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존한다. 전세계 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고, 70% 이상이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대만이 20%로 가장 앞서고, 이어 한국(19%), 일본(17%), 중국(16%) 순이다.

이런 분업화는 각국의 강점이 서로 다르고, 자본과 기술의 진입장벽이 매우 높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현재 최첨단 양산 칩인 5나노미터급 생산 라인 건설에 약 120억달러(약 14조원), 차세대인 3나노미터급은 200억달러(약 23조원)가 소요된다. 과거 수십개 업체가 난립했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은 5나노미터급 칩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삼성전자뿐이다. 그래서 설계만 하는 ‘팹리스’와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즉 ‘팹리스-파운드리 분업 모델’이 정착돼 있다. 미국은 팹리스, 동아시아는 파운드리의 강자다.

특히, 대만과 한국이 중요하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티에스엠시가 있는 대만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63%를 차지한다. 한국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8%에 그치지만, 메모리 반도체에 국한하면 세계 생산의 44%를 차지한다. 대만·한국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의 반도체 전략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반도체 장비도 미-중 반도체 전쟁의 명운을 가르는 부분이다. 자금과 인력, 공장을 갖고 있어도 장비가 공급되지 않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은 미국·일본·네덜란드가 독과점하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미국 반도체 기술이 10% 이상 들어간 소재·부품·장비·제품의 대중국 수출금지 조처를 내리면서 본격화했다. 중국이 2014년 ‘국가 반도체산업 발전 촉진 강요’, 2015년 ‘중국제조 2025’ 전략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선 데 대한 대응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까지 40%, 2025년까지 70%로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2020년 자급률은 15.7% 수준에 그친다. 반도체 굴기를 상징했던 칭화유니그룹은 무리한 사업확장을 하다가 올해 7월 파산 신청을 했다.

그러나 중국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름의 성과도 내고 있다. 중국은 2014년 조성한 1기 반도체 펀드(약 21조원)를 제조·설계 역량 확대에 집중 투자했는데, 분야별로 대표 기업들이 서서히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화웨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은 설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운드리 업체인 에스엠아이시(SMIC)는 14나노미터급 칩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다. 삼성전자·티에스엠시에 견줘 3세대 이상 뒤진 것인데 5년 정도의 기술 격차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창장메모리(YMTC)는 첨단 제품인 128단 낸드플래시를 지난해 개발해 올해부터 양산을 시작했다. 삼성전자·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그보다 앞선 176단으로 넘어가고 있어 1세대 이상 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장비 분야에선 첨단 장비는 만들 수 없으나, 45·65나노미터급 수준의 장비는 양산이 가능하다. 고성능 칩은 만들 수 없으나 차량용이나 낮은 급의 휴대전화 칩 등은 자체 생산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중국은 2019년 조성한 반도체 2기 펀드(약 34조원)로 취약 분야인 소재·장비 부문의 국산화에 주력하고 있다. 상하이마이크로전자(SMEE)는 지난해 28나노미터급 노광장비를 2021~2022년 출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의 승패는 누구도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승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가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첫번째는 동맹·우방국과의 협력 관계다. 미·중 어느 나라도 글로벌 공급망을 벗어나서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대만·네덜란드 등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적 길목에 있는 국가들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낼 수밖에 없다. 동맹과 관련해선 미국이 유리한 것은 분명하다.

두번째는 시장이다. 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도 시장을 잃으면 설 땅이 없어진다. 중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물량의 60%를 소비한다. 여전히 휴대전화·노트북 등을 조립하는 ‘세계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반도체 수출의 60%가 중국으로 향한다. 미국 퀄컴은 매출 3분의 2가 중국에서 나온다. 미국이 첨단 노광장비의 대중국 수출은 금지하면서도 14나노미터급 이하 범용 칩 제조장비의 반입을 계속 허용하는 이유다. 중국 시장과의 단절은 가까운 시일 내에는 현실화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중국은 이 과정에서 자체 기술을 축적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중국 경제가 별 탈 없이 성장을 지속한다면 시간은 중국 편이다.

세번째는 생산성과 혁신역량이다. 미·중 모두 자국 내 반도체 일관생산체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약점이 있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낮은 생산성으로 제조 경쟁력이 떨어진다. 정부 보조금을 줘가며 인텔 같은 미국 회사들이 생산시설을 확충하도록 하고, 동맹국 회사들의 공장 유치를 하는 게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벌써부터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에 고객정보 등 영업기밀까지 요구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중국은 ‘자력갱생’이라는 기치 아래 점차 내부지향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혁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에이에스엠엘 페터르 베닝크 대표이사가 올해 4월 미국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수출통제 조처로 중국과 단절하면 중국은 기술주권을 향한 노력을 가속화할 것이다. 15년 안에 중국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외국 납품기업들에) 중국 시장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중국과의 상호의존은 지속돼야 하며, 10년 이상의 긴 시계를 두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박현 논설위원.
1994년부터 경제·국제·사회부에서 주로 일했으며, 워싱턴특파원·국제부장·경제부장·부국장 등을 지냈다. 특파원 시절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 미국의 대외정책과 군산복합체 등을 취재했으며, 2015년 미국의 사드 배치 의도를 폭로한 보도로 관훈언론상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 알리바바 등 중국 주요 첨단기업과 금융회사들의 발전상을 현장취재했다. G2의 패권 경쟁이 한국 경제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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