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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낡아빠진 ‘배신 타령’은 이제 그만

등록 2021-10-04 04:59수정 2021-10-04 21:31

디지털 혁명은 사라져가던 부족주의와 부족정치의 부흥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도 소셜미디어와 유튜브가 공론장을 같은 편끼리만 모이는 곳으로 재편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족정치에서 가장 몹쓸 악덕은 배신이다. 배신이 최근 수년간 정치적 논쟁과 논란에서 자주 쓰인 단어들 중 하나라는 건 우리가 부족정치에 충실했다는 걸 시사해준다.

강준만ㅣ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목을 졸라야 제 아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미국 철학자 스티븐 아스마가 한 윤리학 토론회에서 ‘편애’를 옹호하다가 엉겁결에 한 말이다. 그는 토론회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스마가 <편애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내놓은 주장 중엔 동의하기 어려운 게 많았지만, “편애가 인간의 행복을 상당히 증진시킨다”는 점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공적 영역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편애도 괜찮은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사는 게 피곤할 수밖에 없다. 공적 영역에서의 편애를 불공정으로 보는 그들은 그걸 거부하기 위해 고민하고 신경써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지도 다를 게 없다. 주변을 둘러보라. 일단 정해진 자신의 편애에 따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묻지 마 지지’를 하는 사람들의 열정적 얼굴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사전엔 ‘고민’이란 단어가 없기 때문일 게다.

아스마는 “좌파는 편애가 없어지지 않으면 ‘열린사회’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통하지 않는 말이다. 편애에 관한 한 좌파나 우파나 다를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편애를 무엇으로 위장하느냐 하는 포장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편애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부족주의엔 좌우의 차이가 없다.

디지털 혁명은 사라져가던 부족주의와 부족정치의 부흥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도 소셜미디어와 유튜브가 공론장을 같은 편끼리만 모이는 곳으로 재편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족정치에서 가장 몹쓸 악덕은 배신이다. 배신이 최근 수년간 정치적 논쟁과 논란에서 자주 쓰인 단어들 중 하나라는 건 우리가 부족정치에 충실했다는 걸 시사해준다.

그간 수없이 쏟아진 ‘배신 타령’ 중 최악은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인 유승민을 향한 것이었다. 유승민이 박근혜를 배신했는가? 언급할 가치조차 없지만, 굳이 따져보겠다면 말은 바로 하자. 박근혜가 유승민의 충정 어린 고언을 잘 새겨들었더라면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누가 배신을 한 건가?

이런 위계 중심의 ‘배신 타령’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유승민이 대선 출마 후 첫 행선지로 대구·경북을 방문한 것과 관련해 언론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배신자’ 낙인 벗을까” 운운하는 기사들을 양산해냈다. 그간 나온 이런 종류의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관련 문장만 몇개 소개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배신자 낙인’을 지우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탄핵 이후 불거진 배신자 프레임을 대구·경북 지역을 찾아 정면돌파하겠다는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을 비롯해 전통적인 보수층에 각인된 ‘탄핵 배신자’ 이미지도 벗어나야 할 굴레다.” “유 전 의원이 ‘희망22 동행포럼’ 창립 행사 장소로 대구를 택한 것은 자신에게 붙은 ‘배신자’ 논란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 전 의원에게 대구는 고향이자 내리 4선을 한 지역구이면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배신’의 낙인이 여전히 남아 있는 가시밭이다.” “박 전 대통령의 유죄가 확정된 뒤에도 유 전 의원은 대구·경북 민심이 빚은 ‘배신자 프레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다. 기자들은 ‘배신자 프레임’과 ‘배신자 낙인’이 옳다고 믿는 걸까? 그럴 리 만무하다. 기자들은 옳건 그르건 ‘배신자 프레임’과 ‘배신자 낙인’은 엄존하는 ‘팩트’이므로 그렇게 쓰는 게 뭐가 문제냐는 반론을 할지 모르겠지만, 해석은 팩트의 영역이 아니잖은가. ‘배신자 프레임’과 ‘배신자 낙인’을 반박하는 짧은 해석을 덧붙이진 못할망정 유승민의 정치적 행보마다 ‘배신자’ 딱지를 소환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언론이 ‘배신자 프레임’의 주범은 아닐망정 공범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유승민 개인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건 의외로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공사 구분 의식이 없는 부족주의적 사고와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역대 모든 정권에서 일어난 대형 비리 사건들의 이유였다. 한국인들의 끈끈한 부족주의 문화는 좋은 점이 많지만, 공적 영역에선 부정부패와 ‘정치의 이권화’를 초래한 주요 이유였다. 아무리 부족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낡아빠진 ‘배신 타령’만은 이제 제발 그만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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