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한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는 요구가 늘면서, 공적 돌봄 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확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은형ㅣ문화기획에디터
지난달 추혜인 의사가 쓴 <경향신문> 칼럼을 읽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로운 돌봄 모델을 운영하는 공동주택에 방문한 고위공무원이 활동지원사와 함께 생활하는 70대 여성에게 “어르신, 며느리 같고 참 좋으시지요?”라고 말했다는 부분에서였다. 몸이 불편한 노인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당연히 며느리란 말인가?
가부장 의식에 찌든 그 공무원의 발언이 불쾌한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신문을 읽다 보면 분노가 치미는 기사가 하루에도 수십개인데 나는 그 칼럼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뭔 말 같지 않은 소리야’라고 시원하게 지를 수만은 없는 끈적한 감정이 떨어져나가질 않았다.
이제 내 또래들의 살아계신 부모는 젊어야 칠십대, 흔히 팔십대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한다는 나이, 본격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연령대다. 하지만 아직 생업에 바쁘고, 한참 자라거나 독립하지 못한 자식을 키우는 요즘의 중장년에게 부모 돌봄은 쉽지 않은 과제다. 갱년기 등 자신의 체력 저하까지 겹치면서 돌봄노동은 가정불화나 최악의 파국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나 ‘남의’ 부모와 법적 가족이 된 며느리 입장에서의 돌봄은 더 난감한 문제가 되곤 한다. 설마 여기서 사위도 똑같은 처지가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은 없겠지. 강요든 자발이든 시부모에게 헌신하는 며느리 ‘미담’은 널리고 널렸지만 처가 부모에게 헌신하는 사위 이야기는 초장수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도 본 적 없다.
사실 내 세대는 며느리가 아들의 ‘대리 효도’를 할 수 있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간접적인 대리 효도의 압박 또한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20년 가까이 이따금씩이라도 얼굴을 보고 지내다 보면 특별히 살가움이나 애틋함이 없는 관계라도 전설의 영화 <올가미>의 시어머니가 아닌 이상, 쇠약해져가는 노년에 대한 연민도 생긴다. 이 와중에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설마 저요?) 자신의 부모 문제에 무심한 배우자까지 옆에 있으면 오만가지 감정이 드는 것이다.
‘돌봄’은 상호적이다. 서로 간의 신뢰와 애정, 연민이 없는 돌봄은 돌보는 이를 고통과 분노에 빠뜨릴 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이도 기능적 도움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게티이미지뱅크
노령화와 함께 ‘돌봄’은 사회 전체의 이슈가 되고 있다. 오로지 가족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는 지적과 요구가 늘면서 공적 돌봄 시스템도 갖춰지고 있다. 현실적 필요에 비해 여전히 부족한 돌봄 시스템은 좀 더 과감하게 진전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돌봄은 시스템만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 지난해 말 낙상을 한 엄마가 입원한 병실은 병원에서 운영하는 간병인이 관리하는 다인실이었다. 대소변 처리를 비롯해 식사나 온갖 돌봄을 전문 간병인이 기민하고도 깔끔하게 처리했지만 가족의 손길 또한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족이 번갈아 등장해 베개를 매만져주고, 심부름을 하며 종종 고통에 지친 환자의 짜증까지 받아주는 침상과 달리 내내 홀로 무표정하게 누워 있는 침상 위 노인은 옆자리에서 보기에도 착잡하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가족으로 10년간의 과정을 기록한 <케어>에서 저자는 돌봄을 “자아와 관계를 가꾸는 것” “선의 구현이며 인생의 깨달음을 연결시켜주는 상징적이자 실질적인 다리”라고 말한다. 아무리 고상한 하버드 의대 교수라고 해도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가 10년 동안 나빠지기만 하는 아내를 돌보며 겪은 사투와 좌절의 허심탄회한 고백을 따라가다 보면 고통 없는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돌봄이 이런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돌봄은 상호적이라는 것, 돌봄을 받는 환자 쪽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픈 아내는 정신이 흐려지면 남편을 침입자라며 난동 부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맑은 정신이 돌아올 때면 저자를 격려하고 용기를 줬다고 한다. 발병 전 부부가 공유한 40년 역사도 그 상호작용의 배경이 됐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돌봄을 ‘폭탄 돌리기’로만 받아들이는 건 그 상호작용을 지우고 오로지 보호자의 의무와 희생으로만 그 의미를 채우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가부장 문화가 강요하는 며느리의 ‘도리’ 같은 게 전형적이다. 신뢰와 애정, 연민 등의 상호작용이 없는 돌봄은 돌보는 이를 고통과 분노에 빠뜨릴 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이도 기능적 도움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몇달 전 정년을 앞둔 선배가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휴직했다. 인기가 높은 본인의 기명 코너도 가지고 있고, 박수를 받으며 빛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직장생활에서의 마지막 해를 기꺼이 반납한 그의 결정이 놀라웠다. 그는 남성이다. 쇠해가는 노모와 보내는 고되지만 충만한 시간이 30여년 직장생활의 빛나는 마무리보다 그에게 훨씬 더 값어치 있으리라. 우리는 돌봄에 대해 이제 조금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