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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백지고발장은 부도나지 않았다

등록 2021-09-14 04:59수정 2021-09-14 10:15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지난 12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경선 예비후보 12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유튜브 라이브 방송 ‘올데이 라방'에 출연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지난 12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경선 예비후보 12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유튜브 라이브 방송 ‘올데이 라방'에 출연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남일 사회부장

판사들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말하곤 한다. 검사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검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수사를 골라 할 수 있는데, 판사는 배당되는 사건만 관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기 법정 사건에는 소송 진행부터 유무죄까지 전일적 권한을 행사하는 판사가 사건 선택까지 탐하면 어떻게 될까. 과거 촛불사건 재판 배당 장난을 넘어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선 부장검사가 부하검사 지휘하듯 일선 재판 선고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려는 판사들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의견서를 제출하면 그에 맞춰 선고를 내주겠다는 취지로 사주까지 했다.

남의 권한은 내 손안의 권한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잊게 한다. 대법원 대법정 들머리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것에는 단지 불편부당 의미만이 아닌, 남의 것을 곁눈질 말라는 또 다른 경구가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검사들 역시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고 한다. 증거를 훼손하고 도주할 것 같아 영장을 청구해도 판사가 그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힘들여 수사해 재판에 넘겨도 사소한 절차적 흠결, 딱딱한 법리 해석, 판사 자유심증을 들어 무죄 선고 하면 당해낼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골라서 수사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수사와 기소가 상당 부분 분리되면서 뷔페 식단, 한정식 한상차림 앞에서 무얼 먹을까 고민하던 시절은 끝나고 남이 차려준 밥상, 입맛에 안 맞는 단품요리 몇가지에 젓가락을 깨작거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고 푸념한다. 그마저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젓가락 싸움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듣고 있으면 보자기에 싸인 수사기록 한덩이 들지 못할 집단 무기력증에 감염된 이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 권력의 한 축을 이룬다. 검찰권력 정점에서 밀려난 윤석열 라인이든, 이들과 대척에 있다는 친정권 검사든 누구 하나 이런 호명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살아 있는 권력과의 싸움이라는 명분, 제 살 깎는 검찰개혁이라는 대의, 명분과 대의를 따른 달콤한 대가가 이들에겐 백신이자 부스터샷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법조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범여권 인사와 언론인에 대한 검찰의 고발 사주 의혹에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권한을 둘러싼 어떤 질척거림이 느껴진다. 국정에 대한 짧은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자질 논란만 불러일으켰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수사실무를 전 국민에게 가르치고, 공수처를 향해서는 기본이 안 됐다며 호통쳤다. 사람은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것을 할 때 돋보인다. 다만 살아 있는 권력과의 싸움이라는 명분을 한참 넘어선 사안을 두고 정치공작, 괴문서라고 화부터 내니 사람들 의심은 커진다.

윤 전 총장은 국민의힘 대선후보 압박면접 자리에서 자신이 지시한 정황과 증거가 나오면 대선 후보에서 사퇴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정적 질문’이라며 답변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바로 앞 질문 역시 가정을 전제로 했는데 답을 했다. 손준성 검사가 고발장을 전달한 것이 확인될 경우 관리 책임을 묻는 질문이었다. “검찰총장으로서 살피지 못한 부분에 대해 국민께 사과할 수 있겠지만 현재는 진행 중이다. 그래서 빨리 조사하라는 입장이다.”

나는 확실히 안 했지만 손 검사까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사과는 할 수 있다는 식이다. 정말 윤 전 총장은 사과로 퉁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상식에 부합하는 정황만 드러나도 그렇게 끝내기 힘든 사안이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 자리는 윤석열 라인이냐가 중요한 자리가 아니다. 누가 됐든 검찰총장을 매일 대면해 동향정보를 보고하는 직책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나는 몰랐다, 밑에서 알아서 한 것이라 했지만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구속기소한 것은 윤 전 총장이었다.

사람들은 백지수표를 착각한다. 우선 종이 지(紙)가 아닌 땅 지(地)를 쓴다. 흔히 생각하듯 받은 사람이 아무 액수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발행하기 어렵다. 대체로 사전에 합의한 만큼 적는다. 고발인 이름이 비어 있는 백지고발장은 누가 누구와 말을 맞춘 것인가.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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