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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의를 품은 숲과 성냥공장

등록 2021-09-12 21:25수정 2021-09-12 21:39

[서울 말고] 박주희ㅣ‘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1. 휴일이면 한적한 시골길로 낯선 차들이 들어선다. 한참을 달리면 길가에 아담한 숲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발길을 쫓아 숲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이 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한 메타세쿼이아가 두 팔 간격으로 촘촘히 서 있다. 마치 비밀의 숲에라도 들어선 듯하다. 400미터에 이르는 메타세쿼이아 산책로가 길게 뻗어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머리까지 맑아진다. 곧게 뻗은 나무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또 한번 감탄을 자아낸다. 드문드문 벤치가 있어 쉬어 가기 좋다. 맑은 날은 맑아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운치가 있다. 이름 모를 풀들이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 바지런한 손길로 세심하게 가꿔서 참 정갈한 숲이다. 경북 영덕 벌영리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 이야기다. 언제부턴가 지역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찾더니 이제는 꽤 알려졌다. 영덕 여행을 검색하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최근에는 지역관광기관협의회가 뽑은 전국 언택트 관광지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편하게 드나드는 동네 숲이자 여행객에게는 인생샷을 남기는 명소로 발길을 끈다.

#2. 경북 의성에 ‘성냥 마을’이 있다. 마을이 성냥을 주제로 한 미술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성냥 등, 성냥 나무, 성냥 담장, 성냥 의자, 성냥 우편함까지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구경하며 골목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마다 성냥공장에서 일했던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지금은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일 때나 쓰지만, 80년대까지 성냥은 집집마다 있는 생필품이었다. 불처럼 살림이 일어나라는 의미로 집들이 단골 선물이기도 했다. 전국에 성냥공장만 300여곳에 이르렀다. 1954년 이 마을에 문을 연 성광성냥공업사도 한때 직원이 160명까지 일하는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차츰 가스라이터가 보급되고, 중국산 성냥에 밀리면서 전국의 성냥공장들이 다 문을 닫았다. 버티고 버티던 이 공장도 2013년 결국 문을 닫았다. 성냥 생산 설비까지 그대로 둔 채 공장의 철문은 굳게 닫히고 성냥의 역사도 멈추는 듯했다. 그러다 2018년부터 이곳에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성냥 이야기가 있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자칫 쇠락한 시골 마을로 잊힐 뻔한 곳에 청년들이 찾아들어 골목을 누비며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지역에서나 있을 법한 흔한 관광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숲과 폐업한 성냥공장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데는 숨은 이유가 더 있다. 영덕 벌영리 숲은 개인이 가꾼 사유림이다. 주인장이 선산에 혼자 한 그루씩 메타세쿼이아를 심어 20년 가까이 키워냈다. 보기 좋은 숲이 되자 누구든 찾아와 쉴 수 있게 무료로 개방했다. 지금도 꾸준히 숲을 가꾼다. 누구에게든 숲을 내어주는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냥 스치는 풍경으로만 남았을 그저 평범한 숲이다. 사유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숲을 찾는 방문객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낯모르는 주인장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층 따뜻한 위안을 얻어 간다.

의성의 성냥공장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도 소유주가 관련 유산 전부를 지역에 선뜻 내놓은 덕분이다. 소유주의 뜻에 따라 유족들이 공장터와 건물, 성냥 생산 설비 190점을 의성군에 기증했다. 이에 힘입어 성냥공장이 폐산업시설 문화 재생 사업지로 선정돼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될 예정이다. 2025년까지 예산 178억원을 들여 공장 내부를 체험관으로 꾸미고, 생산 설비도 전시한다. 소유주가 공장을 기꺼이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근대산업 유산인 성냥공장은 보존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부동산 가치로만 평가받는 처지가 됐을지 모른다. 자고 나면 오르는 집값 탓에 지역 구석구석까지 투기 바람으로 들썩인다. 그런 중에도 벌영리 숲이나 성냥공장이 온전히 있어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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