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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승부조작이 필요한 때

등록 2021-09-09 18:56수정 2021-09-10 02:34

[삶의 창] 이명석|문화비평가

“엄마는 친척들이 떠나면 판을 벌여 우리가 받은 용돈을 수금해 갔어요.” “삼촌은 우리 세뱃돈이 자기 지갑이었죠.” 명절이면 집집마다 화투판이 벌어지고 눈물과 울화통의 사연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나는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였다. 정작 세뱃돈이나 용돈은 받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명절이 지나면 내 주머니는 두둑해져 있었다. 그 배후엔 교묘한 승부조작이 숨어 있었다.

어느 해 가족이 된 매형은 우리 남매에게 고스톱이란 걸 가르쳐주더니, 착착 경쾌한 소리와 함께 쌈짓돈을 털어 갔다. 그게 참 이상한 게, 번번이 내가 이기기 직전에 덜미를 잡아채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약을 올려놓고선 기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판돈을 올리자고 했다. 어쩐지 어른의 계략 같았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패가 잘 붙었다. 특히 마지막에 잔뜩 쌓인 패를 쓸어담으며 일발 역전으로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야 매형이 소위 ‘영업 상무’이고 ‘잃어주는 고스톱’이 주요한 업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져준다는 건 아름다운 기술이야.” 나는 이런 지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색을 하며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다.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원칙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의외로 어린 시절 은근히 패배를 강요당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넌 여자애가 오빠 기죽이려고 꼬박꼬박 이기려 드니?” “인마, 눈치 밥 말아 먹었냐? 중대장이 작정하고 쏜 슛을 왜 막아?” 이들은 승부가 걸린 경쟁 자체를 싫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서 소년 천재 기사는 좀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바둑 축제에서 의원 등 후원자 4명과 다면기 대국을 하는데, 주최측으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져주세요. 이기지 않으면 화를 내는 분이에요.” 어린 기사는 큰 혼란을 겪는다. 최선을 다해 이기는 승부 외에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심 끝에 방법을 찾아낸다. 일반 바둑 대국은 항상 반 집 차 이상의 승부가 나게 되어 있지만, 접바둑엔 무승부가 가능하다. 4명 모두와 비겨 버린다.

프로 기사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직장 상사, 거래처 사람, 데이트 상대와 당구, 골프, 컴퓨터 게임을 하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져주는 데도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상대의 성향 파악이 제일 중요하다. 자신을 봐주며 일부러 지는 걸 절대 용납 못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는 진지하게 승부를 하면서도 상대가 뭔가 배웠다라는 마음이 들게 해주는 게 좋다. 어떻게든 이기는 걸 좋아하는 상대도 최대한 아슬아슬하고 짜릿하게 승부를 만들어주는 게 좋다. 가장 안 좋은 태도는 이렇다. 대충 져줄 테니까 빨리 끝내세요.

“요즘 애들은 져주는 걸 못해요.” 교사나 부모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곤 한다.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많으니 형제자매 간에 져주는 일을 경험할 기회가 적다. 온라인 게임에선 얼굴 모르는 존재와 싸우니, 어떻게든 이기는 것만 중요하다. 나아가 삶의 모든 부분을 점수화하고 경력으로 만들려고 하는 상황이니, 작은 실수나 패배에도 민감하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엄마, 오늘 땡땡이가 노래방 점수에서 나를 처음 이겼는데 너무 좋아하더라. 내가 졌는데도 기분 좋았어.” 어떤 부모는 그 아이를 대견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넌 졌는데 왜 좋아해?” 야단치는 부모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경기나 시험 같은, 최선과 정정당당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야 하는 영역이 있다. 그 세계에서 승부조작은 가장 비열한 짓이다. 그러나 그 바깥에선 여유를 부려봐도 좋지 않을까? 이기면 이기는 대로 좋고, 지면 내 친구가 즐거우니 좋다. 그게 패배의 쓰라림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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