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찻집으로 사용하는 비사벌초사 모습. 박임근 기자
박임근ㅣ전국팀 선임기자
“재개발 추진 논란으로 철거 위기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전통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전주에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게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개발논리를 들이대며 ‘비사벌초사’(신석정 시인 고택)를 흠집내려는 그 어떤 불순한 의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족시인 신석정 선생 고택 지키기 시민단체협의회’는 지난 6일 성명을 냈다. 시인의 고택 ‘비사벌초사’를 현 위치에 그대로 원형 보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관선4길 42-9에 위치한 비사벌초사는 시인이 직접 작명했다고 한다. ‘비사벌’은 ‘완산’과 함께 불리는 전주의 백제 때 이름이다. 경남 창녕의 신라시대 이름이라고도 한다. ‘초사’는 풀로 이은 누추한 집을 뜻한다.
지난달 27일 비사벌초사를 직접 방문해봤다. 신석정(1907~1974) 시인이 1961년 전북 부안에서 전주로 이사를 와 눈을 감을 때까지 햇수로 14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전주시는 2018년 이곳이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보고 전주시 미래유산 14호로 지정했다.
한옥 본채와 사랑채, 정원이 있는 이곳은 지금 전통찻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날은 비가 왔다. 정원에 들어서자 가곡 <목련화>, <옛 동산에 올라> 등이 계속 흘러나왔다. 빗방울 소리와 함께 운치가 있었다. 정원에는 100여가지 수목이 있다. 전북 부안 출신인 시인이 직접 고향에서 수목을 가져와서 가꿨다고 한다. 여기서 시집 <빙하> 등을 집필했다. 또 이곳에서 이병기·박목월·김영랑 등 당대 시인과 교류했다. 그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 서정적·목가적 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지만, 일제에 항거해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해방 뒤에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족혼이 투철했다. 그는 1961년 조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단식의 노래, 춘궁은 다가오는데)를 발표했다가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고 한다.
주인 백명주씨는 27년 전인 1994년에 구입했다고 한다. 남편이 분재를 좋아해 여러곳을 찾다가 이곳을 얻게 됐다. 찻집을 낸 배경도 설명했다. 2010년대 전주한옥마을이 뜨면서 찾는 이들이 늘었다. 결국 사진을 찍는 방문객의 관리가 요구됐고, 차를 마실 휴식공간도 필요했다. 그래서 2018년 10월 찻집을 열었다.
현재 이곳 주변은 외지인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도 개발과 보존으로 서로 의견이 나뉘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외지인 상당수가 이곳 주변에 땅을 갖고 있다. 주민들끼리 서로 개발 여부를 놓고 다투도록 하면 안 된다. 보존을 원하는 주민은 빠지고 시가 개발자와 맞서 해결해야 한다. 고택을 보존하고 주변을 공원화할 계획으로 시가 곧 입장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초 마을주민과 문학인 등을 중심으로 보존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대책위 신성하 위원장은 “주민 70% 이상이 개발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존을 원하는 주민들은 이 일대 소유주를 정확히 조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백씨는 “개발자 쪽에서는 다른 터를 마련해 옮기도록 제안하지만, 이축을 하면 시인의 숨결이 끊어진다. 고인의 시집 5권 중에서 3권을 이곳에서 냈다. 부안에 있는 고택 ‘청구원’도 시인의 원래 생가가 아니다. 이곳마저 뺏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껍데기는 가라’의 민족시인 신동엽의 생가와 문학관은 충남 부여에 잘 보존돼 있다. 2013년에 개관한 신동엽 문학관은 생가 옆에 자리해 있다. 올곧은 저항의 목소리를 낸 민족시인을 기리기 위해 여기서 해마다 4월에 추모행사와 함께 백일장이 열린다. 주인 백씨는 마지막으로 꿈을 말했다. “시인의 고택이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중에 문학관이 세워져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이곳을 다녀가면 좋겠습니다. 주변이 시인의 마을로 특화돼 도시재생으로 다 함께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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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시인이 별세한 방에 내걸린 고인의 사진. 박임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