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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심채경의 랑데부] 오로라라고는 사진으로밖에 못 본

등록 2021-09-02 17:59수정 2021-09-03 02:38

심채경 | 천문학자

1499년 6월30일 밤. 연산군은 어두운 하늘에 횃불과 같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본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에 나타난 그 빛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흐르는 듯 움직이다가 두어시간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천문에도 능했다는 김응기를 불러 물었더니 그것은 붉은 기운(赤氣)이라고 답했다. <연산군일기> 34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김응기가 붉은 기운이라고 일러준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오로라다. 핀란드나 아이슬란드 같은 고위도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때때로 더 낮은 위도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보면 북위 37도의 한반도에서도 때때로 오로라가 관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에도 오로라는 가끔 평소보다 낮은 위도까지 내려오겠지만 이제 도시의 밤은 너무 밝고 하늘도 좁아 오로라를 보기 어렵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날아오는 입자가 지구 대기에 부딪히며 내는 빛이다. 북극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생기기 때문에 지구 밖에서 보는 오로라는 타원형이다. 태양을 탈출한 입자는 지구뿐 아니라 다른 행성으로도 가닿는다. 그래서 목성에도, 토성에도 오로라가 생긴다. 망원경으로 관측한 목성 오로라 자료를 종종 들여다보지만 지구 오로라를 직접 본 적은 없는 나를 포함해 천문학을 전공한 친구들과 함께 오지 전문 여행사에서 일했던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여행사에서는 오로라 관측지로 유명한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다녀오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맨눈으로 오로라를 보았던 경험담을 들으며 그저 감탄하던 우리에게 그가 불쑥 말했다. 오로라는 여름에 더 잘 보인다고.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천문학 전공자들은 단체로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저마다 이유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사실 오로라는 겨울에 더 잘 보인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겨울밤이 길고 여름밤은 짧기 때문이다. 오로라가 아무리 하늘을 색색으로 물들인다 해도 해가 떠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여름 극지방에는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있다. 반면 겨울에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이 어둡기 때문에 오로라를 자주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오로라 이야기 중 연산군의 기록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도 그 시기가 여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기록은 대부분 한겨울에 관측된 것이다. 그러니까 오로라를 보러 가려면 일단 밤이 긴 겨울이어야 성공 확률이 높을 텐데 오히려 여름을 추천한다니. 묻지도 않은 질문에 전공자 티를 내면서 정답을 맞히고 싶었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이유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오로라를, 우주를, 지구 밖 세상을 배웠던 사람들이 놓친 것은 지구의 자연이었다. 옐로나이프에는 멋진 호수가 있는데, 날이 추워지면 호수는 얼음으로 뒤덮인다. 늦여름, 밤은 적당히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직 호수는 얼어붙지 않았을 때가 관측 적기다. 바로 지금 같은 시기, 여름 끝자락에서부터 추분 무렵까지 한달 남짓 동안에는 하늘에는 오로라가, 호수에는 물에 그 반영이 함께 일렁이며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아직 가을이라 추위에 떠는 고생도 덜 수 있다고 했다.

살다 보면 차안대를 씌운 경주마처럼 눈앞의 것만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면 꽤나 식견이 깊은 체하고, 경험이 풍부한 척하며,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우물에 빠지게 된다. 그러느라고 가끔 우리가 본래는 꽤 넓은 시야와 공감능력과 정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오로라가 감싸던 밤 풍경의 감동을 전하는 여행자 앞에서 교과서에서 읽었던 설명을 읊으며 한번 뻐겨볼 궁리나 하는, 오로라라고는 사진으로밖에 못 본 천문학 전공자처럼 말이다.

여름 오로라의 감동을 전해 듣고 나니, 커피소년의 노래 ‘안녕, 오로라’가 들어 있는 앨범 제목이 <여름밤 탓>이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연산군이 여름밤에 잠 못 이루다 오로라를 만난 연유가 무엇일지는 잘 모르지만, 커피소년이 오로라를 노래하는 이유는 가사에 잘 담겨 있다. 그 밤 아름다운 오로라보다 더 아름답고 눈부신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늦여름, 망원경으로 관측한 목성 오로라 자료를 들여다보며 오로라 여행사 직원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목성의 오로라는 모니터로만 보아야 하지만, 어느 해인가에는 지구 오로라를 보러 늦여름 여행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안녕,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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